멀쩡한 보도블록 아직도 갈아엎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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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에 사는 송모씨(34 )는 최근 한 달 정도 진행된 단지 내 보도블록 교체 공사 때문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연말이라 바쁘다 보니 퇴근이 늦어져 매일 차를 몰고 나가는데,보도블록 공사 때문에 부족한 주차공간이 더 협소해져 낭패를 봤다.

새벽에 퇴근해 주차할 곳을 찾느라 단지 주변을 두세번씩 돈다는 것이다.

서울 잠실동에 사는 김모씨(41)도 장미아파트 앞에서 잠실중학교까지 인도 옆에 자전거길을 새로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여기저기 먼지가 날리는 등 보행상의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김씨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데 연말에 굳이 이런 공사를 하는 걸 보면 예산이 많이 남은 모양"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올 연말에도 어김없이 서울시 전역에 보도블록을 교체하거나 자전거길을 새로 설치하는 등 남는 예산을 써버리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건설교통부가 올 상반기부터 설치한 지 10년을 넘지 않은 보도블록을 교체할 경우 도로관리심의위원회의 심의를 얻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보도설치 및 관리지침'의 시행에 들어갔지만,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자치구 등 지자체들은 "걷고 싶은 거리 조성사업을 시행한다"는 등의 명목을 내세워 공사를 예년처럼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연말에 낭비성 예산 지출이 크게 늘어나는 것은 비단 자치구뿐만이 아니다.

서울시 등 광역 지자체,심지어 중앙정부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기획예산처가 예산낭비대응팀을 상시 운영하고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쓰고 있지만,예외 규정이 많아 이 같은 지출을 막기가 녹록지 않다.

공공기관들이 연말에 예산집행을 급격히 늘리는 것은 일단 예산집행률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업별로 연초에 배정되는 예산이 당초 예상보다 과다하게 책정돼 예산이 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배정예산 대비 집행예산,즉 예산집행률이 다음 해 부처별 평가에 점수로 반영되는 데다 다음 해 예산 규모가 대체로 전년 예산을 기준으로 책정돼 올해 예산을 적게 쓰면 내년 예산이 줄어든다.

이에 따라 공공기관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보통 예산집행률을 100%로 맞추려고 한다.

자치구들은 통상 2월이 예산집행 만료 기한이기 때문에 연말연시에 예산집행을 집중한다.

예컨대 서울 서초구의 경우 11월 말까지 예산집행률이 50∼60%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예산집행이 집중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기획예산처 산하 '예산낭비 신고센터'에 접수된 신고 건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2005년 811건에서 2006년 2184건,올해 1∼8월 1141건에 이른다.

이 같은 추세라면 올해 총 신고 건수는 지난해 수준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신고된 사례 중 타당한 것으로 인정돼 시정 조치된 건수 역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타당하다고 인정된 사례는 2005년 91건에서 2006년 113건,올 들어 8월까지 59건으로 연말까지 집계가 끝나면 지난해 수준을 훨씬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최인욱 '함께하는시민행동' 예산감시국장은 이와 관련,"연말 예산 낭비와 같은 사례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참여와 감시를 보다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 시민단체들의 전문성과 역량도 함께 키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종현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