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홍국영

TV드라마 '이산' 덕에 정조는 물론 홍국영(洪國榮,1748~1781)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은다.

홍국영은 당시 왕실 외척이던 풍산 홍씨 일가로 스물셋(영조 47년,1771)에 문과에 급제했다.외모가 '매우 준수하다'는 기록(영조 48년 '승정원 일기')이 나오는 걸 보면 인물도 출중했던 듯하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세손(이산) 보좌역인 시강원 설서(說書)를 맡은 뒤 세손 편에 섰다.

영조가 금한 '시전(詩傳,詩經 주해서) 요아편(蓼莪篇,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다룬 대목)'을 읽다 들킨 세손을 위해 몰래 해당 부분을 찢어낸 것을 비롯,노론 벽파의 각종 음해에서 세손을 구해냈다.홍국영이 없었으면 정조의 즉위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실로 뛰어난 킹 메이커였던 셈이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을 것은 당연지사.고마움의 표시로 그에게 '유이삼사(宥爾三死',죽을 죄도 세 번 용서하겠다)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임금의 믿음이 이 정도니 세상에 거칠 게 없었을 터,정조 즉위 후 4년은 홍국영의 세상이었다.

임금과 대궐을 수호하는 숙위소 대장으로 도승지를 맡는 등 문무 요직을 겸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다.

그것도 모자라 후궁(원빈)으로 들였던 여동생이 병사하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세자로 세우려다 뜻이 안맞자 역모죄를 씌워 죽게 만들었다.그러나 야욕은 늘 멸망을 낳는 법.왕비 김씨가 원빈을 살해했다고 의심,그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발각되면서 가산을 적몰당하고 축출됐다.

스물여덟에 권세의 정점에 섰다 서른둘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탓인가.

그토록 가까웠던 정조에게 쫓겨난 지 1년 만에 강릉에서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킹 메이커로 알려지면 어딘가 숨어 있어도 줄을 대보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공(功)과 친분을 앞세워 세도를 부리면 그 원성은 고스란히 윗전에게 돌아간다.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여.킹 메이커라고 소문난 사람,스스로 킹 메이커라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 홍국영의 생애를 잘 돌아볼 일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