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갑ㆍ을ㆍ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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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 제임스무역 대표ㆍseoulsusan@naver.com >
얼마 전 작은 광고기획사를 설립한 후배를 만났다. 비합리적인 대기업 조직이 싫어서 나름 의식있게 살아보겠다고 독립한 친구다. 작은 규모지만 자신의 회사가 생겨서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늘 화사했던 후배 얼굴이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로 안부를 물어오기에,"을순이 상황이 어떠니"라고 되물었다. 무역이나 행사 등 대행 의존율이 높은 우리 회사라서 불합리한 '갑을관계'가 늘 불만이었는데 후배가 새로 이 일을 시작한다니 대견한 한편으로,걱정이 되기도 했다. 후배의 대답은 예상하던 것보다 더 나갔다. "을순이라면 다행이게요. 병질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 '병질'이란 용역을 발주하는 갑,용역을 이행하는 을로부터 재하도급을 받아 일하는 것을 말하는 업계 속어다.
"행사를 하나 수주했는데 물가가 크게 오르며 비용이 당초 계획보다 많이 들어갔어요. 을 측에 하소연했지만 자기도 어렵다면서 갑과의 계약조건을 바꿀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갑 측은 콧방귀만 뀌고…."
해줄 말이 없었다. 을 생활을 오래 해온 나도 알고 후배의 을에게 수주를 맡긴 갑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부도 알 것이다. 단지 자신에게 손해가 미치는 것을 피하려 서로 회피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아마 대기업에서 오래 생활해온 후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용역이 하청과 재하청을 거치면서 온갖 부조리가 발생한다는 것을.대기업 다니던 후배도 과거엔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라고 무시했는데 지금은 당사자가 돼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지 않을까. 후배에게 다시 말했다. 그래도 큰 조직에서 월급쟁이로 있는 것보다는 지금 생활이 낫지 않으냐고.후배는 확실히 대답을 못했다. 다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발전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이것을 막는 장벽이 생각보다 높고 단단하네요"라고 내뱉었다.
물론 후배의 어려움이 불합리한 기존 시스템 때문만은 아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도 누구는 성공하고 병에서 을로,갑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 친구의 말이 귓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은 젊은이다운 문제 제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죠.그러다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되고요. 이제 시작일 뿐이잖아요. "
후배가 오히려 내게 힘을 줬다. 나도 기성세대로서 현실에 안주해 왔을까. 잃어가고 있는 생각들을 일깨워줬다. 그를 만나 나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마음을 다잡았으니 오히려 내가 행운아다.
얼마 전 작은 광고기획사를 설립한 후배를 만났다. 비합리적인 대기업 조직이 싫어서 나름 의식있게 살아보겠다고 독립한 친구다. 작은 규모지만 자신의 회사가 생겨서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늘 화사했던 후배 얼굴이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로 안부를 물어오기에,"을순이 상황이 어떠니"라고 되물었다. 무역이나 행사 등 대행 의존율이 높은 우리 회사라서 불합리한 '갑을관계'가 늘 불만이었는데 후배가 새로 이 일을 시작한다니 대견한 한편으로,걱정이 되기도 했다. 후배의 대답은 예상하던 것보다 더 나갔다. "을순이라면 다행이게요. 병질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 '병질'이란 용역을 발주하는 갑,용역을 이행하는 을로부터 재하도급을 받아 일하는 것을 말하는 업계 속어다.
"행사를 하나 수주했는데 물가가 크게 오르며 비용이 당초 계획보다 많이 들어갔어요. 을 측에 하소연했지만 자기도 어렵다면서 갑과의 계약조건을 바꿀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갑 측은 콧방귀만 뀌고…."
해줄 말이 없었다. 을 생활을 오래 해온 나도 알고 후배의 을에게 수주를 맡긴 갑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부도 알 것이다. 단지 자신에게 손해가 미치는 것을 피하려 서로 회피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아마 대기업에서 오래 생활해온 후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용역이 하청과 재하청을 거치면서 온갖 부조리가 발생한다는 것을.대기업 다니던 후배도 과거엔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라고 무시했는데 지금은 당사자가 돼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지 않을까. 후배에게 다시 말했다. 그래도 큰 조직에서 월급쟁이로 있는 것보다는 지금 생활이 낫지 않으냐고.후배는 확실히 대답을 못했다. 다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발전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이것을 막는 장벽이 생각보다 높고 단단하네요"라고 내뱉었다.
물론 후배의 어려움이 불합리한 기존 시스템 때문만은 아니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도 누구는 성공하고 병에서 을로,갑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 친구의 말이 귓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은 젊은이다운 문제 제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죠.그러다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되고요. 이제 시작일 뿐이잖아요. "
후배가 오히려 내게 힘을 줬다. 나도 기성세대로서 현실에 안주해 왔을까. 잃어가고 있는 생각들을 일깨워줬다. 그를 만나 나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마음을 다잡았으니 오히려 내가 행운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