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고려 목종이 몰락한 까닭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ㆍ과학사>

거란 노략질이 고려 쿠데타 불러, 정쟁일삼는 국회 반면교사 삼길두 주일 뒤면 새해 2009년이다. 갑자기 1000년 전의 우리 모습이 궁금해진다. 꼭 1000년 전인 1009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해 기유년은 고려 7대 목종 12년이었다. 그리고 그해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월 '강조(康兆)의 쿠데타'였다.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는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와 목종을 몰아내고 현종을 새 왕으로 세웠다. 그는 목종을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으며,그 와중에 한때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누렸던 45살의 천추태후(목종의 어머니)는 권좌에서 밀려났고,그의 정부(情夫) 김치양은 태후가 낳아준 6살짜리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때는 거란이 북쪽에서 발호하던 전란의 시절이었다. 압록강 남쪽 소위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요구하며 고려를 괴롭히던 거란은 이번에는 강조의 쿠데타를 처벌하겠다며 다시 강을 건너왔다. 바로 다음 해 1010년 11월 거란 임금 성종이 40만 군대를 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거란군을 여러 차례 물리쳤던 강조는 적을 깔보고 바둑을 두다가 그만 창졸간에 적군의 포로가 됐다.

거란군 포로가 된 고려군 총사령관은 양탄자에 둘둘 말려 거란 왕 앞에 던져졌다. 거란 성종은 그를 풀어 놓고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강조는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바로 아래 부사(副使) 이현운은 "두 눈이 이미 새 세상을 보았으니 어찌 옛 산천을 그리워하겠소!"했다. 이리하여 두 사나이의 생과 사가 갈렸다. 1011년 정월 초하루 적군은 수도인 개성에 들어왔고,그들은 궁궐과 민가를 불태웠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고려는 주로 하공진의 외교로 항복의 치욕을 면했고,침략자는 물러갔다. 그동안 백성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1018년 거란은 고려가 약속과 달리 조공도 않고 강동육주도 돌려주지 않는다며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강감찬과 강민첨 등은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흥화진에서는 냇물을 막았다가 갑자기 터트려 거란군을 혼란에 빠트려 무찔렀고,패퇴하는 적군을 귀주에서 섬멸했다. 10만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명이었다.

그의 승리는 역사에 '귀주대첩'이라 기록됐고,오늘날 그가 태어났던 자리에는 낙성대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서울의 전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서울대 뒷문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 시기를 오늘 우리 역사책은 '거란과의 30년 전쟁'(993~1019년)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꼭 한 세기 뒤 이번에는 여진족의 금(金)이 거란족의 요(遼)를 물리치고 중국의 송나라를 제압해 남쪽으로 밀어붙인 다음,고려의 굴복을 요구했다. 거란군에는 항복하지 않았던 고려도 1126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거란의 침략은 강조의 쿠테타를 부르고,여진족의 위협은 이자겸의 난(1126년)과 묘청의 난(1135년)으로 이어졌다. 외부의 위협은 국내의 긴장과 갈등을 고조시켜 폭발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오늘 우리를 위협하는 경제위기는 이 땅에 어떤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는가. 예산조차 제대로 토의해 넘기지 못하고 정쟁만 거듭하는 오늘의 한국은 현대판 외부 위협에 우리 내부의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현상이 아닐까.

새해를 맞으며 1000년 전을 그려보다가 흥미로운 뉴스에 접했다. 보름 뒤(1월3일)부터 KBS가 '천추태후'라는 연속극을 방송한다는 소식이다. 천추태후와 그의 애인 김치양,그리고 강조와 강감찬 등이 모두 등장할 모양이다. 드라마를 본 친구들이 또 그런 사실이 있느냐며 캐물을 게고,나는 "그건 드라마 속 픽션일 뿐"이라 되풀이하는 기축(己丑)년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