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미야모토 무사시, 평생을 방랑武士로 떠돈 사연

새해 벽두에 나누는 덕담은 세상을 사는 예의지만,간혹 덕담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 때문에 영 마뜩찮을 때가 있다. 순리(順理)를 기원한다는데 듣고 보면 힘의 법칙을 따르겠다는 선언일 때가 그렇고,화평(和平)하자면서 너부터 항복하라고 협박할 때가 그렇다.

중동에서 강자의 일방적 공습이 벌어지고 여의도에선 소수 야당이 결사농성 중인 가운데 새해가 밝았다. 음력으로는 해가 바뀌지 않았으니 좀 이른 감은 있지만,아무래도 기축년 한 해는 힘을 숭상하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높이 쳐든 칼날 아래는 지옥,(생사의 백척간두에서) 한발 내디디면 그곳엔 극락."

일본 역사상 최강의 검호(劍豪)로 꼽히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1584~1645)는 피가 튀는 대결의 미학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칼 아래 상대방의 목숨이 떨어지듯 상대의 칼 아래 내가 서는 순간엔 무엇이 남을까?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음(無)'일 뿐.

전국시대 끝자락에 태어난 그는 시대를 호령하는 무장(武將)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가 첫 진검승부를 펼친 것은 불과 열세 살 때였다. 상대는 쟁쟁한 칼잡이였는데, 필사의 싸움 끝에 쓰러뜨렸다. 열여섯 살 때는 검법의 일가를 이룬 거물을 베었고, 스물한 살이 되면서부터는 천하를 주유하며 내로라하는 검의 명인들을 차례로 베어 쓰러뜨렸다. 그의 자술(自述)에 의하면 나이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모두 60여차례 대결했는데,그걸 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을 자신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생사를 건 최후의 대결은 규슈 오구라번의 무술교관 사사키 고지로와 외딴섬에서 펼친 결투였다. 간류파 개조인 사사키는 일반 검보다 1.5배 긴 장검을 쓰는 것을 종지로 삼았는데,무사시는 배의 노를 깎아 만든 더 긴 목도로 일격에 그를 눕혀버렸다. 유명한 간류지마(巖流島)의 결투다.

그는 이기는 검법에 일생을 걸었다. 62세로 다다미 위에서 죽기 한 달 전에 탈고한 병법서 ≪고린쇼(五輪書)≫는 그의 검법 니텐이치류(二天一流)가 지독한 훈련의 산물임을 말해준다.

"천일의 연습을 단(鍛)이라 하고, 만일의 연습을 련(鍊)이라고 한다. 아침에 천일 분량의 연습을 하고 저녁에 만일 분량을 연습한(朝鍛夕鍊) 끝에 쉰 살 무렵이 되자 저절로 병법에 들어맞았다. "하지만 그는 불행한 검의 천재였다. 스무 살 무렵 도쿠가와막부의 평화시대가 열리고 무장의 시대는 끝났다. 전장을 잃은 검은 정신적 유희인 무사도(武士道)로 흘렀고,그의 검법은 평화를 거스르는 무용장물(無用長物) 취급을 받았다. '싸울 수 없다면 검술교관이 되자'고 방향을 틀었지만 번번이 경원당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검법을 연마할수록 꿈은 점점 멀어졌다. 한번은 쇼군의 가신에 발탁될 큰 기회가 왔다. 어전시합 때 자신의 검법이 얼마나 센지 보여줄 심산으로 쇼군의 훈련대장을 간단히 이겨버렸다. 자존심을 구긴 쇼군 쪽의 결정은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한다'였다. 그는 성을 나서면서 "내 실수였다. 시합을 하지 말고 처음부터 그에게 머리를 숙였으면 됐을텐데…"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다른 영주들도 너무 강한 그를 데려다 쓰면 막부로부터 모반의 의심을 받을까봐 아예 모른 척했다. 그는 강하면서도 그 강함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을 방랑무사로 떠돌았다. 그는 시대정신의 변화를 읽지 못했던 것이다.

노자는 '아주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아주 큰 소리는 잘 들리지 않으며, 아주 큰 형상은 오히려 형태가 없다(大方無隅 大音希聲 大象無形)'고 했다. 보검은 칼집에 들었을 때 빛이 나고, 큰 힘은 가만히 있을 때 더욱 묵직한 법이다. 강자가 힘의 논리를 말하고 전쟁을 선포하면 세상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왕도를 찬양하고 패도를 비난하는 것이다.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