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淸 옹정제의 후계자 지명법

"짐은 너의 못된 행실을 보고도 못본 척하며 25년을 참고 또 참았다. 아비를 원수로 삼은 너로 인해 짐은 오늘은 독약에, 내일은 자객에게 당할까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 내 신상의 불행은 둘째 문제, 조종(祖宗)의 역사를 더럽혀서야 되겠는가. 너 같은 불효자를 태자의 자리에 둘 수 없다. "

강희제는 청(淸)의 전성기를 연 영명한 군주였지만 아버지로서는 지극히 불행했다. 그것은 제위를 물려줄 후계자 때문이었다. 황제는 일찍이 꽃다운 나이에 아이를 낳다 죽은 황후를 못 잊어 두살배기 황자를 황태자로 세웠지만, 이게 문제였다.

주변에 야심가들이 줄을 서고 붕당(朋黨)을 이루자 황태자는 정치 보스로 성장했고, 급기야 살아 있는 부황(父皇)의 자리를 넘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희47년 늘그막에 황제는 마침내 황태자 폐위를 선언했다.

원래 중국의 황제 계승은 서출이 아닌 적자(立嫡不立庶), 능력보다 장자 우선(立長不立賢)이 원칙이었다. 황제의 처첩들이 생산한 여러 황자들의 권력투쟁을 방지하기 위해 생전에 후계자를 못박아두는 황태자 제도도 만들어졌다. 반면 청의 지배자 만주족은 북방기마민족의 관례대로 황제가 죽은 뒤 유력 부족장들이 모여 능력있는 자를 합의추대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것이 중국문물 흡수 과정에서 3대 황제 순치제가 처음으로 죽기 직전 3남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권한을 누렸고, 4대 강희제는 아예 황태자를 지명해 두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공석이 된 황태자 자리를 놓고 나머지 34명의 황자들 간에 다툼이 격화되자 황제는 반년 만에 복위시켰지만, 얼마 못가 2차 폐위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짐은 최근 3년간 참고 또 참았다. 앞으로도 더 참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만 자식 사랑에 빠져 패가망신했다는 선조의 꾸중은 들을 수 없다. ?b 황태자 건은 이후 일절 입에 올리지 말라."같은 이유, 같은 선언이었다.

강희61년 황제는 임종 자리에서 제4황자 윤진(옹정제)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공식사서는 전한다. 그러나 강희제가 총애했던 제14황자라는 뜻으로 '십사(十四)'를 불러주었으나 윤진과 미리 짠 대신이 받아적으면서 한 획을 더해 '4황자에게(于四)'라고 변조했다는 괴담이 끊이지 않았다.

늦다면 늦은 45살에 정통성 의혹까지 산 새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기발한 황태자 책봉 시스템을 내놓았다. "자고로 황태자는 불초한 자들이 많았다. 이것은 황태자가 되고 나면 이제 내 세상이려니 하고 공부와 수양을 팽개치고 관료들 줄이나 세우기 때문이다. 황태자 제도는 좋지 못한 법이지만, 천자(天子)도 언젠가는 죽으므로 후계자 지정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짐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

자금성의 황제 집무실인 건청궁 보좌 천장에 걸린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황태자의 이름을 적은 문서 상자를 숨겨둘테니 황제 유고 시 열어보고 그대로 하라는 얘기였다. 합법적이지 못한 자가 보좌에 앉으면 그 머리위에 무거운 편액이 떨어질 것이란 비공식 경고와 함께.

'황태자를 몰래 정해 두는 제도(太子密建法)'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후보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청 말기까지 역대 황자들은 서로 근신하고 공부에 힘썼다. 이 덕분에 성격 파탄 황제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고, 1%의 만주족이 거대한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고 역사는 평가한다. 지난 설 전후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가 과연 누구냐에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의 장자 김정남이 베이징공항에서 잇따라 선보인 파격행보 때문이다. "누가 아버지를 이어받을 것 같으냐?" 마치 연예인에게 공연계획을 인터뷰하듯 한 일본 언론이 던진 당돌한 우문(愚問)에 "그건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고 한 유력 후계자의 현답(賢答)이 압권이다. 세계가 북한을 이렇게 보는 지경이니 항간에 '요즘 베이징에 출몰하는 김정남은 가짜'라는 설까지 나돈대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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