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위기와 기회

이철휘 < 한국자산관리 공사 사장 leech@kamco.or.kr >
오랜만에 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 전 심각한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일본만은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았으므로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가 보니 엄청난 공포가 경제 · 사회 전반을 압도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탓일까. 그야말로 급속히 얼어붙고,그 누구도 희망을 얘기할 여유가 없이 그저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는 듯 보였다. 사실 미국과 유럽도 더하면 더했지 이보다 낫지는 않은 듯하다. 자유시장경제의 선봉에서 철칙으로 지켜온 각종 경제원칙들을 뒤로 하고 적극적인 정부 개입과 규제를 통해 생존에 올인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이례적이다.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한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약간의 낙관과 안도감마저 퍼져가고 있는 듯하다. 결코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간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에 따른 긍정 신호일 것이다. 더욱이 정부의 선도 아래 '위기는 기회다'란 대합창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가고 있는 점,그 자체가 우리가 갖고 있는 바이탈리티일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언제부터인가'위기'를 논하는 것보다 '기회'를 얘기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 걱정이 앞선다. 아직 본격적인 위기는 그 무서운 실체를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태평양 너머에서 발생한 경제 쓰나미가 이미 대양을 가로질러 밀려오는 상황에서 방책을 쌓거나 고지대로 피난하기보다는 쓰나미 이후의 여건 선점을 위해 도로 보수공사나 집 담벽 외장공사에 힘쓰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호에만 그치지 않고 '위기'를 진짜 '기회'로 만들려면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위기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사실 지난 외환위기 때도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그 위기의 진정한 배경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그 충격은 더 컸고,회복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 구성원 모두의 희생과 인내가 대전제돼야 함도 자명하다. 더욱이 '임기응변'이나 '새옹지마'류의 경험적 대처로는 자칫 위기를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철저하고 세심한 대비와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본래 '위기'란 말 자체가 '위험'과 '기회'를 뜻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위기'란 말의 '위'와 '기'의 간극이 천릿길이 될 수도 있고,숨찬 고갯마루 뒤에 이어지는 평탄한 오솔길이 될 수도 있다. 다행이 우리는 이미 위기극복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고,국민적 결속력도 강하다. '위기'란 말 본연의 뜻처럼,우리 경제가 현재의 위험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와 발전적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