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채권단 무서워 본사도 못 옮겨"
입력
수정
임도원 건설부동산부 기자 van7691@hankyung.com지난 1월 금융권 채권단으로부터 '부실징후'인 신용위험평가 C등급을 받아 워크아웃(기업개선절차) 실사가 한창인 중견 건설업체 A사.이 회사는 신용위험평가결과 발표 직전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에 있는 사옥을 팔기로 하면서 수도권 외곽으로 본사를 이전할 계획이었다. 사옥 매각으로 유동성을 확보하는 한편 경기도 성남에 소유한 아파트형 공장에 입주해 임차료 지출도 막겠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워크아웃 대상으로 선정되자 최근 수도권 이전 계획을 취소했다. 사옥 매각은 그대로 추진하되,대신 강남 일대에 임차해 들어갈 빌딩을 알아보는 중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은행 등 채권단 본사가 모두 서울에 있는데 수도권 외곽으로 본사를 옮기면 채권단 관계자들이 왕래하기 불편해진다"며 "워크아웃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 서울에 그대로 머물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채권단과 멀어지면 밉보일까 무서워서'라는 얘기다. 반면 B등급(일시적 유동성 부족기업)을 받아 워크아웃 대상에서 제외된 다른 건설사들은 빌딩 매매가와 임대료가 비싼 서울을 잇따라 떠나고 있다. 벽산건설은 여의도 본사를 인천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고,동일하이빌은 이미 강남에서 천안으로 본사를 옮겼다.
A사가 본사를 수도권으로 옮기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한 것은 필요 이상으로 '알아서 기는' 처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극도의 눈치보기를 하게 된 데는 그만큼 두려움을 갖도록 채권단이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부 은행들은 직원에 대한 월급이나 하도급 대금 지급 등 C등급 기업의 세세한 자금운용까지 간섭하고 있다. 직원 개인이 신규 대출을 받는 것까지 막는 은행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A사는 스스로의 의지로만 서울에 남기로 한 걸까.
걸프전을 다룬 '쓰리킹즈'라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포로로 잡힌 미군 백인 병사에게 이라크군 병사가 뜬금없이 "왜 마이클잭슨이 하얗게 피부를 벗겨냈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자기가 좋아서 그랬겠지"라는 답변에 이라크 병사는 "너희들 때문이다,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모멸감을 줬기 때문"이라며 언성을 높인다. 혹시라도 채권단이 건설사의 '피부를 벗기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