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투기 조장하는 SH공사

이호기 건설부동산부 기자 hglee@hankyung.com
17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SH공사 본사에는 때아닌 청약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날 하루 진행된 은평구 은평뉴타운 미계약분 83가구 청약에 대해 무순위로 접수하려는 사람들이다.

만 20세 이상이기만 하면 과거 당첨여부나,무주택 여부,청약통장 유무 등에 관계없이 청약할 수 있었다. SH공사는 이날 청약자만 무려 1000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했다. 거주지에 제한을 두지 않다보니 수도권은 물론 시골에서도 아이를 업고 상경했다. 위임장과 신청서를 한번에 수십장씩 받아간 사례도 속출했다. 완전히 투기장이 따로 없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SH공사 측의 원칙없는 분양 정책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지는 지난해 12월6일자 A13면(21판)에 '은평뉴타운 잔여물량 무순위 청약 방침'을 취재해 보도했었다. 이에 SH공사 측은 투기우려 때문에 방침이 변경됐다며 보도를 부인하는 바람에 본지는 기사를 급히 수정했다.

당시 SH공사는 은평뉴타운 1~2지구의 미계약분 124가구를 재분양하면서 일반 청약과 마찬가지로 입주자모집공고를 내고 정상적인 청약 절차를 밟겠다고 강조했다. SH공사는 "법적으로는 무순위 분양을 할 수는 있으나 기존 청약자의 신뢰를 보호하고 투기를 막기 위한 차원에서 무순위 분양은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SH공사는 12월 말 청약에서 또다시 대거 미달되자 결국 방침을 바꿨다.

김영세 SH공사 고객지원본부장은 "최종 남은 83가구는 대체로 저층이나 방향이 좋지 않은 물건들이 많다"며 "계약자가 많지 않을 것 같아 무순위로 돌렸다"고 해명했다. 김 본부장은 또 "1000명 이상이 청약을 했으나 일부 평형에 몰리면서 또다시 미계약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분양을 가능한 빨리 마무리지어야 하는 SH공사 입장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분양 해소를 위해 스스로의 원칙을 저버린 채 은근슬쩍 투기에 편승하려는 행동은 공기업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