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핀란드의 '따뜻한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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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 정치부 기자 rainbow@hankyung.com며칠 전 여당 중진 A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박연차 리스트'가 화제에 오르자 그는 갑자기 핏대를 올렸다. "어느 기업이 국회의원 299명에게 10억원씩 준다고 해 봐라.그냥 후원한다는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있나. " 자금이 필요한 정치인으로선 대가성 없이 후원금 조로 찔러 주는 돈이면 거부하기 어렵다는 논지였다.
요즘 정치인들을 만나면 단연 '박연차 장학생'이 화제다. 3선 중진 의원이 박 회장의 행사에서 축사를 하고 1000만원을 후원금으로 받아 검찰에 불려 다니는 '살풍경'은 사돈 남 말이 아니다. 여당 의원들은 "그 정도면 주머니 털어 깨끗한 먼지 아니냐"고 오히려 큰소리 친다. 작심하고 상임위 관련 기업들에 일일이 후원금을 강권하며 사실상의 뇌물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다. 정치인에 대한 후원이 '비공개'로 이뤄질 때는 대가 없는 후원금이라도 '블랙 머니'일 가능성이 높다.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공사(公私) 구분이 대단히 엄격해서 공식 후원금의 출처를 놓고도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기 일쑤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백악관에서 법무부 수사관들로부터 두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민주당 정치자금 모금 활동에 관해서였는데 초점은 후원금 권유 전화를 백악관의 집무실에서 했느냐,사저(私邸)에서 했느냐였다. 공직자가 연방청사 사무실에서 정치 자금을 권고하는 건 불법이다. 전화 기록까지 철저히 대조한 결과 전화를 사저에서 했음이 밝혀져 겨우 무혐의로 끝났다.
클린턴은 고액의 정치자금 기부자들에게 백악관 숙식 제공으로 답례(?)하기도 했는데 이것조차 문제가 돼 결국 1995~96년 묵고 간 938명의 명단을 전원 공개해야 했다.
뇌물이 통하지 않는 청정 국가 핀란드의 공직자(국회의원 포함) 윤리 강령에는 '따뜻한 맥주와 찬 샌드위치가 적당하고 그 반대가 되면 위험하다'는 문구가 있다. 기분 좋게 찬 맥주와 따뜻한 샌드위치를 먹듯 좋고 편한 것만 찾으면 반드시 부정(不正)의 유혹에 빠진다는 경고다. 대한민국 국회의 구내 식당에도 메뉴에 따뜻한 맥주와 찬 샌드위치를 올려 놓으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