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든든한(?) 식약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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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생활경제부장 ohk@hankyung.com공포영화에는 대개 공식이 있다. 맨 처음 등장한 미녀는 반드시 죽고,주변 인물 모두가 용의자로 떠오른다. 공포의 원인은 미궁이고 진짜 범인은 가장 살인자가 아닐 것 같은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무능하기 그지 없다.
최근 발암물질인 석면 오염 우려가 있는 탤크(활석)가 베이비파우더부터 화장품,의약품에서도 검출된 석면 파동의 진행과정을 보면 지난해 멜라민 사태 때 봤던 식약청식 공포영화의 공식을 답습하는 느낌이다. 과자,초콜릿 등 '멜라민 식품'처럼 우선 소재 자체가 아기 · 여성 · 환자들이 수시로 바르고 먹는 품목이다. 공포감이 빠르게 확산되고 문제가 어디까지인지 혼란스럽다. 영화 속 무능한 경찰처럼 일이 다 터진 뒤에야 식약청이 사후약방문으로 관련 기준을 마련한 것도 판박이다. 멜라민이나 석면이나 '허용기준 미비→무조건 판매중지→억울한 피해업체 양산→소비자 불신 · 혼란'의 연속이다. 물론 석면이 제거되지 않은 원료를 쓴 해당 업체들에 1차적 책임이 있지만 석면 문제를 수년 전에 알고도 기준조차 만들지 않은 식약청은 석면 공포영화의 조연이자 감독인 셈이다. 석면 탤크 파동은 제보를 받은 방송사가 고발 프로그램 제작에 나서면서부터다. 책임 추궁을 우려한 식약청은 방송 직전인 지난 1일 베이비파우더 12개 품목을 서둘러 판매금지했다. 또 일부 업체들에는 방송사에 적극 해명하도록 주문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부랴부랴 식약청은 지난 3일 석면 기준을 만들고,6일 5개 화장품을,9일엔 1122개 의약품을 판매금지 조치했다.
이 중에는 석면 탤크를 지금은 쓰지 않거나 납품 거래선을 바꾼 업체들도 다수 포함돼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조사해서 문제가 없으면 판매금지를 푼다지만 해당 업체들엔 이미 '주홍글씨'가 새겨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식약청이 예방행정은커녕 '선 판매금지,후 조사'를 지속하는 한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업계 일각에선 "식약청이 제약업체들을 공개처형했다"고 비난한다.
선진국에선 법적으로 유죄(guilty)가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추정(presumed innocent)'이 원칙이다. 하지만 국내 식품 · 의약행정은 관련 업체가 무죄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유죄추정'이다. 실제로 유해성분이 있든 없든,멜라민 사태 때는 중국산 유분이 들어간 모든 식품이,이번에는 문제의 탤크를 공급받은 모든 의약품이 판매금지 대상이 됐다. 과거 식약청이 정한 기준대로 만들었어도 말썽이 나면 소급해서 못 팔게 하는 행정편의식 판금 조치와 해제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과학적이어야 할 식약청부터가 비판여론에 따라 오락가락하면 소비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하기 어렵다. 국민 생활의 기초인 식품 · 의약산업은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민감하고 소중한 산업이다. 함부로 다룰 경우 산업 위축은 물론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안전비용'을 치르게 만들 수 있다.
식약청 홈페이지에는 '든든한 식약청'이란 모토가 있다. 국민 건강과 안전을 위해 사전에 철저히 예방하고 신속히 옥석을 가리는 진짜 든든한 식약청을 언제쯤이나 기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