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치맛바람형 내조'…부장님댁 김장까지 챙긴다
입력
수정
사원아파트·사내 부인 모임선 아내가 상사 선물까지 준비김 과장은 요즘 월요일과 화요일엔 집에 일찍 들어가려 애쓴다. TV 드라마 '내조의 여왕'을 보기 위해서다. 그는 여주인공인 천지애(김남주 분)의 눈물겨운 내조에 푹 빠져 있다. 남편을 승진시키기 위해 애쓰는 천지애의 행동은 감동 그 자체다. 물론 그녀의 행동이 과장돼 있기는 하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편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는 천지애가 마음 한켠으로 부럽기 짝이 없다.
돈 벌어 남편 공부 '뒷바라지'…부동산 투자로 노후자금 마련도
가장 중요한건 따뜻한 애정, 닭살 문자 한통에 남편도 든든
김 과장이 드라마를 볼 때마다 아내는 바쁜 척 한다. 어쩌다 같이 볼라치면 "미쳤네,미쳤어"를 연발한다. "요즘에 저런 아내가 어디있냐"며 "나한테는 기대하지 마라"고 미리 못박는 것도 아내의 레퍼토리다. 김 과장은 아내에게 천지애 식의 내조를 터럭만큼도 기대하지 않는다. 담당 부장의 이름도 모르는 아내인데 천지애식 내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걸 잘 안다. ◆'천지애식 내조'도 있기는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송 과장(35)은 2년 전 충북 청주에 있는 사원아파트에서 짐을 쌌다. 아내 이모씨(33)가 너무나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이씨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편 상사의 집안 일을 거드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이웃끼리의 돈독한 정이려니 싶었다.
그러나 횟수가 너무 잦았다. 툭하면 상사 부인들이 호출했다. '오늘은 305호,내일은 602호' 식으로 거의 매일 '차(茶)모임'을 열었다. 특별한 일도 없는데 안 가기도 그랬다. 막상 참석해보면 말단 직원의 부인인 터라 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남편이 상사에게 야단맞은 일도 꼬치꼬치 다 까발려져서 화젯거리가 되는 통에 차모임에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는 게 이씨의 회고다. 이 씨는 "사원아파트에서는 남편 상사의 집안 일이 시댁이나 친정의 집안 일보다 우선"이라며 "이를 내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격이 맞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씨와 반대인 사람도 있다. 남편 상사의 부인들과 자주 접할 수 있다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해 '천지애식 내조'에 적극 나서는 경우다.
군인아파트나 사원아파트처럼 한 직장사람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사는 곳에서는 특히 그렇다. 이런 아파트의 특징은 남편의 서열을 따라 아내의 서열도,아이들 서열도 정해진다는 점이다. 아이들 학부모 모임이나 반상회에 참석하는 사람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그러다보니 '정치력'이 좋은 아내의 남편과 따돌림 당하는 아내의 남편은 직장에서 승진 속도가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안 해본 일도 한다
한 곳에 모여 살지 않더라도 직장 동료의 아내들 간에는 알음알음으로 형성된 친목 네크워크가 존재한다. 명목은 계(契)모임.실상은 남편 직장생활에 영향을 미치려는 게 주된 목적이다. 이들의 서열도 남편의 서열에 따라 정해진다. 한 대기업 홍보팀장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맞벌이를 해서인지 이런 문화가 거의 사라졌지만,대기업 임원급 인사에는 부인들 입김이 아직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그는 "인사철이나 명절에는 상사 부인들에게 아랫사람 부인들이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서 건강보조식품 등을 선물하곤 한다"며 "선물이 대부분 고가여서 뇌물 성격이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
평소 부인 간 네트워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남편 승진을 위해 어쩌다 팔을 걷어 붙이는 사람도 있다. 외국계 제약회사에 다니는 박모씨(35)는 얼마 전 띠동갑 남편의 승진을 위해 안하던 짓을 했다. 박씨는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았다. 남편도 외국에서 고교와 대학을 나왔다. '마음의 정표'는 모르지만,거액의 선물을 한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남편은 승진 심사에서 번번이 물을 먹었다. 마땅한 이유가 없자 '한국식'으로 문제를 풀기로 결심했다. 눈 딱감고 남편 상사인 본부장과 부인에게 상품권 · 만년필 등 200여만원어치를 2년간 선물했다.
그러나 웬 걸.남편 승진인사를 앞두고 본부장은 대기발령을 받고 말았다. 박씨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선물을 해봤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격"이라며 허탈해 했다.
◆최고의 내조는 맞벌이
직장 상사나 부인을 직접 공략하는,'천지애식 내조'를 하는 아내들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반면 남편이 직장에서 능력을 맘껏 발휘해 실력껏 승진하도록 도와주는 아내는 늘고 있다. 결혼 2년차 주부인 강인미씨(31).그는 일본 주재원을 준비하는 남편을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2007년 1년 동안 주말마다 남편과 함께 일본어 학원에 다녔다. 강씨와 남편은 1년 만에 일본어능력시험 1급에 합격했다. 덕분에 남편은 작년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났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남편의 부담감을 덜어주는 것도 최고의 내조로 꼽힌다.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는 정모씨(31)는 맞벌이하는 아내만 믿고 올초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돈은 내가 버는 것으로 버틸 수 있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아내의 말에 용기를 얻은 덕분이다.
전모씨(56)는 남편이 승진에 연거푸 누락돼 명예퇴직을 앞두게 되자 5년 전 스스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적극적인 부동산 투자를 통해 2005년 경기도 용인에 40평대 아파트를 사서 2007년에 거의 두배로 팔았다.
작년에는 경매로 서울 강남 아파트를 사서 30%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지금은 잠실에 시가 80억원가량의 소규모 상가를 사서 임대사업을 하고 있다. 전씨 남편이 "우리 부인이 최고의 노후대책"이라며 치켜세운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마음담은 애정이 진정한 내조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내조는 역시 부부간 애정이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당신을 응원한다'는 닭살스런 문자메시지 한 통도 큰 내조가 된다. 전업주부 8년차인 안모씨(40)는 "절대로 남편 휴대폰과 지갑을 몰래 보지 않고,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나무라지 않는 게 나름대로의 내조"라고 말했다.
그는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다음 날 '어제 피로가 아직 안 풀렸을까봐 걱정된다'는 문자만 넣는다고 했다. 안씨는 "언제나 당신 편,우리 가족은 모두 한 팀이라는 느낌을 주는 게 가장 좋다"고 강조했다. 작년 말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결혼한 김미지씨(29)는 "남편이 일주일 내내 야근하고 새벽별을 보고 나간다"며 "불황에 비상상황이라며 자다가 잠꼬대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찡해서 일과시간에 문자메시지를 종종 보낸다"고 말했다. 그만의 애정표현이 천지애보다 더 훌륭한 내조방식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상은/이관우/이정호/정인설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