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제왕적 대통령制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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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창 정치부장 leejc@hankyung.com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재임기간 중 비리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너무 힘들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집 뒷산에서 투신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국민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전직 대통령의 불행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황제가 부럽지 않은 권력을 누렸던 전직 대통령들은 대부분 말년이 불운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야한 뒤 망명해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하의 총탄에 의해 시해됐다. 육사시절 친구였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은 나란히 구속됐다. 문민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아들의 구속으로 말년에 식물정권으로 전락했다. 금융실명제 도입과 하나회 척결(YS),초유의 외환위기 극복(DJ) 등 큰 업적은 빛을 잃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초반 주변 비리로 곤욕을 치렀다. 핵심 측근인 안희정씨(현 민주당 최고위원)와 여택수 전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이 불법 자금 수수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노 전 대통령은 주변 관리를 대폭 강화했지만 비리의 고리를 끊진 못했다. 노 전 대통령 핵심 측근들의 줄 구속과 본인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를 방증한다.
임기 초반 70% 이상의 높은 국민 지지 속에 출발한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불행해진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권력체제에서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 우리 대통령은 과거 왕조시대의 제왕과 크게 다르지 않다. 3권분립을 얘기하지만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할 장치는 사실상 없다. 실제 얼마 전까지 여당은 '청와대의 거수기'에 불과했다. 노동법을 처리하라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날치기를 위해 여당의 대선 예비후보들까지 버스에 몸을 실었던 게 부끄러운 우리 정치의 현 주소다. 과거와는 다르다지만 170석의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이 정치적 고비 때마다 바라보고 의지하는 곳은 다름아닌 대통령이다. 사법부도 예외가 아니라는 데 이의를 달사람은 많지 않다. 시대가 바뀌어도 대통령 중심의 국정운영은 달라진 게 없다. 한마디로 나라 전체가 대통령 입만 바라보는 구조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다 보니 그 주변의 힘은 셀 수밖에 없다. 과거 대통령 주변 사람들에 '왕실장','왕수석','왕비서' 별칭이 붙은 건 자연스런 결과였다. 각종 로비가 이곳에 집중되는 이유이자 측근 비리가 끊이지 않은 배경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존속하는 한 대통령 주변의 비리는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전 정권의 전철은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비리가 되풀이되는 건 대통령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존재하는 한 이런 악순환은 앞으로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더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선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과 총리가 외치와 내치를 분담하는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 등 권력을 분점하는 방식의 개헌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