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孫楚의 말 실수

세상을 살면서 지음(知音)을 얻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 말이다. 백아의 거문고 타는 마음을 마치 들여다보듯 헤아려준 종자기는 물론이고 관중과 포숙의 관포지교(管鮑之交)는 가장 많이 회자되는 사례이다. 특히 유별난 세상살이로 트러블을 빚게 마련인 재자(才子)에게 지음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중국 서진(西晉 · 265~316)시대를 살았던 손초(孫楚)와 왕제(王濟)가 그런 사이였다. 손초는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영롱한 머리를 지녔으나 강직하고 고집불통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미친 놈(狂夫)을 칭하며 속세를 떠난 은자처럼 살았다. 이런 괴짜의 재주를 이해하고 거둬준 패트론은 황제의 사위로 제일급 귀족이자 구경(九卿 · 장관)을 지낸 왕제였다. "손초가 죽은 아내의 상복을 벗으면서 시를 지어 왕제에게 보여주었다. 왕제가 극찬하며 말했다. '시문이 정에서 생겨나는지,아니면 정이 시문에서 생겨나는지 모르겠구나(未知文生於情,情生於文)!'"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

당시는 과거제가 발명되기 이전으로 향리의 인물평판을 매겨 관리를 등용하던 시절이었다. 평판이 고약해서 스스로 관직과 담을 쌓은 손초에게 길을 열어준 것도 왕제였다.

"왕제가 인사책임자가 됐다. 담당자가 품장(品狀 · 향리의 인물평판)을 작성하려 하자 왕제가 말했다. '손초는 향리의 평판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사람이니,내가 직접 짓겠다. '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영특한 천재,발군의 재주(天才英特,亮拔不群).' 이로써 손초의 관직은 지방장관에 이르렀다. " <〃 언어>이토록 그를 인정해주던 왕제가 죽자 손초가 보인 행태는 과연 오만하고 방약무인한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왕제가 죽자 명사들이 빠짐없이 조문했다. 손초가 뒤늦게 와서 시신을 마주하고 통곡하자 빈객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곡을 마친 손초가 위패를 향해 말했다.

'그대는 늘 내가 나귀울음 소리내는 것을 좋아했으니,이제 그대를 위해 마지막으로 울어보겠네.' 그 모습이 진짜와 흡사하여 빈객들이 모두 웃었다. 그러자 손초가 머리를 들고 말했다. '이런 자들을 안 잡아가고 이 사람을 데려가다니(使君輩存,令此人死)!'" <〃 상서(傷逝)>

다른 기록에는 손초의 거침없는 이 말에 '빈객들이 모두 화를 냈다(賓客皆怒)'고 전한다. 두 사람의 일화 중 '수석침류(漱石枕流)' 이야기는 널리 회자되면서 손초를 아주 유명하게 만들었다.

"손초가 젊어 은자의 생활을 동경했다. 손초는 자연 속에 살고 싶다는 희망을 왕제에게 이야기하면서 '돌을 베개 삼고 냇물로 양치한다(漱流枕石)'고 해야 할 것을 실수로 뒤집어 말했다. 왕제가 꼬집었다. '냇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한다니,가당한 일인가?' 손초가 바로 되받았다. '냇물로 베개 삼는다는 것은 귀를 씻고자 함이요,돌로 양치한다는 것은 치아를 갈고자 함이지(所以枕流, 欲洗其耳, 所以漱石, 欲礪其齒).'" <〃 배조(排調)>전설의 은자 허유(許由)가 요임금으로부터 천하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귀를 씻었다는 얘기로 금세 둘러대는 재치도 재치지만,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그의 고집 센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 고사는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필명으로 쓴 이후 더욱 유명해졌는데,소세키 역시 신경병에 시달렸으니 닮은꼴이라 하겠다.

'한번 뱉은 실언은 사두마차를 타고 뒤쫓아도 잡지 못한다(駟不及舌).' 말 실수를 경계하는 <논어>의 말이다. 험한 세상일수록 실언과 극언을 입에 담는 이들이 많다. 손초의 재주가 있다면 말실수를 금세 덮어볼 수도 있겠지만,이들은 아니 뱉어야 할 말을 한 것을 오히려 훈장쯤으로 여기니 놀라울 따름이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