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투명해져야 할 '4억2000만원'

歲費등 혈세 지출내역 아무도 몰라, 경비 온라인공개…英美개혁 본받길
영국과 미국 의회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경제난으로 고통 받는 국민들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 의원들의 경비 지출 내역을 인터넷에 공개하도록 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불투명하기만 한 경제 난국을 정치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계기로 만들었다. 영국과 미국 의회의 결단은 언론 보도가 발단이 됐다.

5월 초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의원들의 경비 지출 내역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선량들은 호화주택 구입,연못청소,테니스코트 수리 등에 국세를 사용했다. 보도를 접한 유권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1분기 국내총생산이 전년 동기 대비 4.9%나 급감하고 실업률은 7.2%에 달하는 한편 국가 부도위기가 임박했다는 괴담이 떠도는 시기에 의원들이 혈세를 탕진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보도는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묻지마식 비용 청구를 했다가 신문 지면에 이름이 오른 의원들은 잇따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집권 여당인 노동당의 지지율은 10% 대로 추락했다. 이에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경비 청구 내역을 분기별로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야당인 보수당의 데이빗 캐머런 당 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당 소속 의원들의 경비를 즉시 온라인에 공개하도록 했다. 비용 스캔들에 연루된 의원들은 내년에 있을 총선에 출마시키지 않을 것임을 공언했다.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저널이 의회 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5월 말 이 신문은 의원들의 터무니 없는 경비 지출 실태를 폭로했다. 의원들의 실명과 지출 내역이 낱낱이 공개된 기사에 따르면 미국 의원들도 영국 의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고급 세단을 빌리고 고가의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고 공무여행 경비 명목으로 거액을 청구했다.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던 미국 국민들은 이 신문기사에 격분했다.

의회 지도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서로 다투던 민주당과 공화당이 하나가 되어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상원 및 하원 의원들은 여행 경비,보좌관 급여,사무용품비 등 공식적인 의원활동 지원비의 사용 내역을 모두 공개하기로 했다. 상원은 2011년부터 의원활동 지원비 사용내역 보고서를 1년에 두 차례 온라인에 게재하도록 하는 의회 지출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원은 이르면 9월 말,늦어도 올해 안에 의원들의 분기 지출 보고서를 인터넷에 올릴 예정이다. 이제는 우리 국회 차례다. 국회의원들의 지출 경비 내역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2004년 현재,의원 1인은 세비와 보좌진 인건비,사무실 운영비를 합쳐 4억 2000여 만원의 세금을 직접 지원금의 명목으로 받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비용 지출 내역은 공개가 되지 않고 있다. 해마다 국민의 지탄을 받아 온 해외 여행 경비와 같은 간접 지원금의 지출 내역은 더 오리무중이다. 국회사무처는 2002년 의원외교 자료 정보공개 청구 소송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문서 사본을 교부하지 않고 있다.

더 이상은 곤란하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정치권은 큰 홍역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이러한 공개는 국회와 국민 모두에게 윈-윈 게임이 될 것이다. 의원들의 지출이 조심스러워져 세금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의원 외교지원이라는 명목으로 기업에 지원금을 요구하던 관행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들과 경제 위기의 아픔을 함께한다면서 관련 법안 처리를 게을리해서 지탄을 받아온 국회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입만 열면 선진 의회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해온 여야가 영국과 미국의 입법부가 단행한 자기 개혁에 동참할 수 있을지,두 나라가 그랬듯이 경제 위기를 정치 발전의 계기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 주목한다.

윤계섭 <서울대 교수ㆍ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