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따라 모두 변해갔지만…덕수궁 돌담길엔 추억만 켜켜이

늦가을 정동길
대한문~정동교회~옛 러시아 공사관
가정법원 자리엔 시립미술관…이젠 맘 놓고 사랑 속삭이세요!

'마침 지나는 이화여고보 정문에 달린 외등을 쳐다본 여자는,혹은,남자나 마찬가지로 그 밝음을 저주하였는지도 모른다. …(중략) 정동 십삼 번지,양인의 집 외등에는 전구가 없었다. 까닭에 그 맞은편 전신주에 달린 전등은 그들에게는 좀 더 원망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중략) 마침내 그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정문 앞에까지 왔다. 역시 전신주에 달린 전등이,또 맞은편 노서아 영사관의 외등이,남자를 잠시 주저하게 하였으나,그러나 이 골목에서 어둠을 찾는 것이 절망임을 아는 그는,용기를 내어 여자를 이화여전 정문 지붕 밑으로 이끌려 하였다. '(박태원 <애욕> 중)

늦가을 정동길에는 단풍이 나뭇가지에 반,길에 반이다. 한때 정동길 하늘 위를 노랗게 빨갛게 또는 갈색으로 물들였던 단풍잎의 절반 정도는 낙엽이 되어 정동길을 찾는 사람들의 발 아래 깔린다. 정동길이라고 하면 덕수궁부터 경향신문사까지 그다지 길지 않은 거리를 뜻한다. 경보선수처럼 빠르게 걸으면 15분 안에 주파가 가능할 법하다. 하지만 그렇게 성급하게 걷기에는 정동길에 눈여겨 보고 지나갈 만한 것들이 많다. 구보 박태원이 소설 <애욕>에서 묘사한 대로 예나 지금이나 정동길은 연인들이 걷기 좋은 길이다.

정동길은 근대사와 예술과 돌담을 휘감고 있다. 근대사를 따라가려면 덕수궁 · 정동제일교회 · 정동극장 · 옛 러시아공사관을 둘러보고,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덕수궁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을 관람한 다음 정동극장 앞과 예원학교 담벽에 설치된 미술품을 눈여겨 보는 게 좋겠다. 덕수궁 돌담길이 끝나도 조금만 더 걸으면 이화여고와 예원학교를 둘러싼 또다른 돌담이 나온다.

어느 방향에서 시작해도 상관은 없지만 지하철역(1 · 2호선 시청역)에서 가까운 덕수궁부터 걸었다. 덕수궁은 우리 근대사의 격랑과도 연관이 깊다.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했던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했고,일본의 강압으로 아들 순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이곳에 머물렀다. 덕수궁 안에는 덕수궁미술관이 있는데,소나무 사진으로 잘 알려진 사진작가 배병우씨의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전시는 다음 달 6일까지이며 배씨의 작품 97점이 걸려있다.

덕수궁을 나오면 바로 그 유명한 돌담길이다. 이 길을 함께 걸은 연인은 헤어진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의식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늘 눈에 띄는 곳이기도 하다. 샛노란 은행잎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분수를 중앙에 두고 길이 갈라지는 곳이 나온다. 분수 전 왼편으로 꺾으면 서울시립미술관이 있고,분수 바로 맞은편에는 정동제일교회가,분수 오른편으로는 미대사관저로 가는 길이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현재 상설전시 등을 포함해 여러 전시가 진행 중이다.

이 거리에서 자칫하다가는 놓칠 수 있는 작은 조형물이 있다. 가수 이문세씨의 노래 '광화문 연가'를 작곡한 고(故) 이영훈씨의 노래비다. 마이크 모양의 이 노래비에 정동길은 어울리는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광화문 연가'에서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으로 묘사되는 정동제일교회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다. 그런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라도 붉은 벽돌에 하얀 창이 있는 교회 건물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그 옆 미대사관저가 있는 골목은 앞에 경찰들이 지키고 있지만 통행 가능한 길이다.

대사관을 왼쪽으로 끼고 고개를 넘으면 구세군 본영과 덕수초등학교가 나온다. 이곳이 정말 서울 도심일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고즈넉한 풍경에 감탄사가 나올법하다.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광화문 쪽으로 연결된다. 경향신문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곧 오른쪽에 정동극장이 나온다. 국내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 자리에 세워진 극장 안의 작은 공터는 아담하다. 날씨가 좋으면 잠깐 다리를 쉬고 떠나고 싶은 곳이다. 극장 앞에는 설치미술작품도 있다.

정동극장에서 벗어나 더 올라가다보면 다시 돌담길이 펼쳐진다. 한쪽에는 예원학교의 담벽이,다른 쪽에는 이화여고의 담벽이 있어 덕수궁 돌담길과는 다른 정취가 있다. 이화여고 옆을 지날 때 구보가 소설에서 이곳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생각해보면 더 흥미로울 듯하다. 예원학교의 담벽에 설치된 공공미술작품도 눈여겨 보자.긴 LED 패널에 한국어를 비롯해 여러 언어로 정동길에 대한 글이 떠서 흘러간다.

예원학교와 캐나다대사관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옛 러시아공사관이 나온다. 아관파천 때 고종과 순종이 약 1년 동안 머물던 곳으로 우리 근대사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현재는 3층 규모의 탑만 남아있는데 공사 중이라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쉽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