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섹스& 더 시티] 골드미스 '설 나기'…싱글들의 명절病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 밖에

방에 '콕'하거나 방콕으로 여행 떠나거나
친척들에게 '결혼' 잔소리 융단폭격 받거나
보톡스·쁘띠성형·잡티제거로 외모 업그레이드하거나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김하영씨(38)는 지난 추석 연휴를 동남아의 한 휴양지 리조트에서 보냈다. 업무 스트레스를 풀 겸 혼자 떠난 것이다. 해변에 누워 음악을 틀어 놓고 소설을 읽으며 휴가다운 휴가를 보냈다. 김씨는 숙소로 들어오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고 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한 한국 여성이 김씨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친척들의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피해 혼자 휴가를 온 미혼 여성 같았어요. 저희는 말을 트진 않았지만 가벼운 목례를 했습니다. 그 후로 리조트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 씩 웃었죠.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거든요. "

▼친척 20여명이 각자 한 마디씩자의반 타의반으로 택한 싱글 라이프.평소엔 씩씩하게 잘 지내지만 명절은 끔찍하다. 일년에 두 번 찾아오는 설과 추석은 싱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때다. 명절이 다가오기 한두 달 전부터 미리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여성도 있다. 이들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오랜만에 본 일가 친척들이 툭툭 던지는 '언제 결혼하냐'는 질문이다.

광고회사에 근무하는 박찬이씨(32)는 "큰집에 모이는 친척들이 대략 스무명 정도 되는데 이 분들이 각자 한 마디씩만 해도 20번 이상 결혼 잔소리를 듣는 셈"이라며 "매번 결혼 핍박을 받을 때마다 '다음에는 오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조차 결혼하라는 구박을 안 하시는데 평소엔 연락조차 없던 분들이 왜 간섭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오랜만에 봤으니 딱히 할 말도 없고 공통분모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막상 결혼 잔소리로 '융단폭격'을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게 마련이다. 어른들의 지나친 관심은 고맙지만 사양하고 싶다는 게 모든 싱글 여성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인터넷 업체에서 일하는 김유빈씨(30)는 "남자친구 없이 지내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형부가 자꾸 소개팅을 주선하는데 취향이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무조건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며 "거절하기 뭣해 대충 얼버무리면 '처제는 그래서 안 되는 거야'라며 또 잔소리가 시작된다"고 털어놨다. 애인이 있다고 해서 핍박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친구에 대한 친척 어른들의 참견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사촌동생이 결혼할 때 남자 쪽에서 몇억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넌 몸만 와도 된다'고 했다며 염장을 지를 때마다 그야말로 명절은 지옥이다.

▼명절 연휴는 나만의 휴식시간

차라리 친척의 '핍박'을 받는 것이 그립다는 싱글도 있다. 텅 빈 도심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시켜 먹으며 명절을 홀로 보내는 이들이다.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터지도록 '미드'(미국 드라마)를 다운받아 밤낮없이 몰두하는가 하면 며칠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이선혜씨(36)는 몇 해 전 발상의 전환을 결심했다. 명절 연휴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시간'이 아니라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는 기다려지는 휴일'이라고 생각을 바꾼 것."여동생들이 일찍 결혼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저를 짐짝 취급하시기 시작했어요. 엄마나 저나 둘 다 괴롭더군요. 그래서 독립했고 서른두 살이 넘어면서부터는 명절에 집에 가지 않습니다. 떨어져 사니까 부모님이 저를 애틋해 하시던 걸요. 자꾸 잔소리 하시면 용돈을 두둑히 드려요. "

박찬이씨는 몇 해 전부터 연휴계획을 짜는 즐거움이 생겼다고 한다. 작년엔 인도네시아 발리로 휴가를 다녀왔고 올해는 피부과에서 피부 박피 시술을 받을 예정이다. 이제는 먼저 시집간 여동생들이 박씨를 부러워한다. "시부모님과 시댁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그렇게 심할 줄 몰랐대요. 제가 결혼하겠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릴 거라고까지 해요. 여유롭게 사는 제가 부럽다네요. "

상황이 비슷한 싱글 여성들끼리 놀기도 한다. 레지던스를 빌리거나 빈 집에 모여 함께 먹고 마시는 것.호텔업계는 이들을 잡기 위해 다양한 패키지를 선보이고 있다. 그랜드 힐튼호텔은 15일까지 딜럭스 룸 1박과 카페 이용권,2인 조식,광화문 스케이트장 이용권 등으로 구성한 '휴(休)' 패키지(12만원)를 내놓았다. 서울 프라자호텔의 스파 패키지 '캄 앤드 피스'(49만원)는 인삼 성분이 들어간 제품으로 얼굴에 탄력과 윤기를 되찾아주는 프로그램 2인 이용권 등으로 꾸몄다. ▼명절 지나면 얼굴 달라지기도

직장 여성에게는 최소 사흘 이상인 명절 연휴가 '외모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얼굴에 칼을 대는 성형수술은 붓기가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소 부담스럽다. 대신 쁘띠 성형이나 퀵성형(간단한 시술),보톡스,피부관리,퍼머넌트 메이크업(반영구 문신),잡티 제거 등을 많이 한다. 피부과나 성형외과,피부관리숍 등은 최소 한두 달 전부터 예약을 서둘러야 할 정도.홈쇼핑 업체에서 일하는 박혜완씨(32)는 "피부 마사지는 늘 받지만 연휴에는 평소 못 했던 것 위주로 한다"며 "지난해 추석 때는 피부과에서 전신 마사지를 받은 뒤 속눈썹 연장,눈썹 퍼머넌트 등을 한꺼번에 해 수십만원을 썼다"고 말했다.

동안(童顔) 열풍을 따라잡기 위해 어려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다양한 시술을 받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자가지방이식,팔자주름을 없애주는 필러 시술,보톡스 등이 최근 인기다. '지름신'이 내리는 싱글 여성들도 있다. 명절 보너스가 나오면 평소 갖고 싶었던 명품 가방 등을 아낌없이 지르는 것.'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명절이 더욱 힘든 유부녀 친구들

"설이나 추석이 지나면 기혼 친구들에게 꼭 전화가 옵니다. 명절 동안 시댁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어 놓을 상대가 필요한 거죠.친구들의 푸념을 듣고 있노라면 '결혼을 꼭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굳어져요. "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소희씨(31)는 매년 명절을 겪으며 독신에 대한 다짐을 굳힌다고 했다. "효도는 '셀프서비스' 아닌가요. 연애할 때 부모님과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남자친구가 결혼 이후 효자로 돌변하는 사례를 많이 봤어요. 본인 부모님에 대한 의무와 효도를 아내에게 전가시키는 거죠."명절음식 장만 등 힘든 집안일도 갈등의 원인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넌 공부만 하면 돼'라고 세뇌당하며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자란 요즘 미혼 여성들에겐 살림이 직장 업무보다 더 어렵게 마련이다. 서투른 솜씨로 부엌에서 끙끙거리다 보면 어김없이 시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고.김씨는 "유부녀 친구 한 명은 명절 때마다 회사 당직 근무를 자원한다"고 덧붙였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