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멈춘 日경제의 교훈] (下) 기술력 세계 톱·엔고 적응력도 강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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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일본기업은 살아있다일본 기업은 그래도 강하다. 무엇보다 기술이 세계 톱 수준이고 자금도 넉넉하다. 개인보다 팀을 중시하는 경영 방식에다 오랜 경기 침체로 자신감과 도전정신이 시들해졌을 뿐이다. 재무장을 통해 언제든 다시 힘을 낼 수 있다는 얘기다.
FTA협상 대일적자 해소기회 삼아야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 기업이 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들은 1990년대 자산가격 거품 붕괴 이후 제로금리에서도 부채를 줄이는 '디레버리징'으로 체질을 강화했다. 일본 3대 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의 오쿠 마사유키 행장은 "은행과 기업들이 2003~2004년에 부실 채권을 대거 정리하는 등 재무구조를 강화해 건설업체를 제외하면 실물경기 후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나카오 다케히코 재무성 국제국장은 "일본 기업들이 이번 금융위기에 타격이 크지 않았던 것은 그동안 부채를 많이 갚고 군살을 없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 기업들은 산업별로 '규모의 경제'를 위해 합종연횡하거나 강점을 가진 분야에 특화하면서 힘을 키우고 있다. 기타가와 신스케 경제산업성 심의관은 "지난해 신일본석유와 신니코가 플랜트 설비 과잉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통합했다"며 "이런 흐름은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일본 7대 전자업체들은 종합메이커란 타이틀을 버리고 샤프가 TV에 특화하는 등의 방향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기업들의 체질 강화는 엔고에 대한 적응력을 키웠다. 나카지마 아쓰시 미즈호종합연구소 전무는 "이젠 기업들의 재고 조정도 거의 마무리됐다"며 "달러당 90엔이면 엔고가 아니라 적정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기업들도 미래에 대해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올해 창사 100년인 히타치의 핫초지 다카시 대표이사 부사장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고였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시장이 전 세계로 확대됐기 때문에 장기적으론 낙관하고 있다"며 "앞으로 신흥국가들의 원전과 고속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시장을 타깃으로 이익을 창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석유화학 및 첨단 정보기술(IT) 부품 업체로 연 1조엔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는 쇼화덴코의 다카하시 교헤이 사장은 "우리는 전지가 아니라 전지에 들어가는 나노 카본 같은 첨단 소재와 부품을 만들기 때문에 특별한 경쟁사가 없다"며 "한국과 중국은 우리에겐 소재와 솔루션을 제공하는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이런 일본 기업들은 우리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일본 입장에서는 이보다 한 단계 아래인 경제동반자협정(EPA)에 큰 기대를 걸고 협상의 속도를 올리려는 분위기다. 최근 경제산업성이 한국실을 따로 설치키로 한 것도 이를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이지마 히데타네 일한경제협회장은 "지난해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 가운데 210억달러가 기계부품류인데 FTA가 체결되면 한국은 휴대폰 TV 등에서 현재 8%인 관세를 부담하지 않고 일본에서 부품을 조달해 다시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며 FTA 조기 체결을 강조했다.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교수는 "FTA 협상에서 한국은 기계류,일본은 농산물이 장애물이지만 이는 사소한 문제"라며 "체결이 지체될수록 양국엔 손해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과의 FTA 협상 과정에서 지난해에만 276억달러에 달하는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협상을 서두를 이유가 별로 없다.
이에 대해선 일본 측도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다만 부품과 소재에서 한국의 대일 의존도가 높은 만큼 단시일 내에 해소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 우리는 일본과의 FTA 협상을 중국을 포함한 3자 구도를 염두에 두고 이끌어가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일본 입장에선 이 문제가 대중 견제 전략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여당인 민주당이 취약한 지지율을 의식해 한국과의 FTA를 정국 타개의 돌파구로 삼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렇듯 일본은 우리와의 FTA 협상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와 재계 모두 종합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때다.
도쿄=문희수 논설위원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