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미디어 키우자] (3) 케이블 방송 편성·매출 제한에 시장은 '잔챙이들의 전쟁'

(3) 규제 풀고 대형화해야
규제 덫에 걸린 방송산업
초라한 진흥정책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K씨는 최근 케이블TV(SO) 요금고지서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동안 즐겨보던 애니메이션 채널이 다음 달부터 편성에서 제외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케이블TV 고객센터에 문의했지만 "편성정책이 변경돼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K씨뿐만이 아니다. 최근 케이블TV업체들이 방송채널 편성을 조정하면서 일부 인기 채널들이 제외되는 바람에 불편을 겪는 시청자들이 늘고 있다.

◆인기 채널도 못보게 하는 방송 규제작년 말 계열사를 통해 온미디어를 인수한 CJ미디어는 케이블TV들과 채널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애를 먹었다. 온미디어 인수로 방송채널이 21개로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불이익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방송법 편성 규제 탓이었다.

현행 방송법 시행령에 명시된 케이블 방송채널(PP) 사업자에 대한 편성 규제는 △케이블TV가 방송채널을 편성할 때 특정 PP(특수관계자 포함)의 채널이 20%를 초과할 수 없고 △케이블TV들이 운영하는 PP가 35%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20% 규제의 경우 70개 방송채널로 구성하는 아날로그 방송 상품에서는 특정 PP의 방송채널이 14개를 넘을 수 없게 된다. CJ미디어의 경우 21개 방송채널 가운데 7개 채널은 원천적으로 케이블TV의 기본 채널에 편성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35% 규제는 PP를 갖고 있는 케이블TV(MSP)들의 채널 수를 제한하는 규제다. 현재 티브로드 등 대형 케이블TV들이 보유한 방송채널이 38개인데 70개 채널을 편성하는 기본형 상품에는 12개 채널을 편성할 수 없게 된다. 이 같은 이중 규제 때문에 CJ미디어처럼 채널이 많은 PP는 특정 SO에 20% 규제 상한선인 14개 채널에 훨씬 못 미치는 채널을 서비스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CJ미디어 관계자는 "편성 규제 탓에 케이블TV별로 기존에 방송하던 5~9개의 채널을 더 이상 서비스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방송콘텐츠 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본력과 능력을 갖춘 대형 PP를 육성하는 것이 시급한데 편성 규제가 이를 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주용 인하대 교수는 "중소 PP들의 균형 성장을 위해 도입된 제도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경쟁력 있는 방송 콘텐츠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매출 4200억원 넘는 PP는 규제 대상방송채널 사업자에 대한 규제는 편성 규제에 그치지 않는다. 지상파방송이나 케이블TV,위성방송,인터넷TV(IPTV) 방송사업자에는 없는 매출 규제까지 받고 있다. 현행 방송법 시행령에는 특정 PP의 방송 매출이 전체 PP 방송매출총액(홈쇼핑 제외)의 33%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2008년 기준으로 PP 방송매출액이 1조3800억원가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특정 PP의 매출액이 4200억원을 넘을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때문에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온미디어를 인수한 CJ미디어는 매출 규제에 묶여 PP사업을 더 성장시킬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방송 전문가들은 정부가 방송콘텐츠를 육성하고 글로벌 미디어 기업을 발굴하겠다는 정책 목표를 갖고 있으면서도 유독 PP에 대한 규제만 2중,3중으로 쳐놓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최성진 서울산업대 교수는 "한해 매출이 40조~60조원에 이르는 타임워너 디즈니 등 세계적인 미디어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빼앗고 있는 것"이라며 "국내 방송사들이 덩치를 키워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도록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장원 CJ미디어 전략기획실장은 "타임워너만 해도 100건이 넘는 인수 · 합병(M&A)을 거쳐 글로벌 미디어기업으로 성장했다"며 "국내에서도 해외 미디어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만큼 시장원리에 따라 미디어기업들이 자유롭게 M&A 등을 통해 규모를 키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콘텐츠 진흥정책도 손질해야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등 방송 주무부처들의 방송콘텐츠 진흥정책에도 손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상파방송 프로그램을 케이블 방송채널에서 재탕,삼탕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PP나 방송제작사 등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영화계와 지상파 방송사는 정부의 콘텐츠 펀드와 보조금 지원을 받고 있으나 케이블 방송채널 등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지원이 미흡한 탓이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PP들의 콘텐츠 제작을 지원해주는 펀드 규모부터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방통위는 매년 100억원씩 3년 동안 300억원을 모태펀드에 출자해 민간과 공동으로 700억~1000억원 규모의 방송콘텐츠 투자조합을 결성할 계획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경쟁력 있는 방송 프로그램이 TV방영에 그치지 않고 극장판과 DVD 등으로 판매될 수 있도록 방송콘텐츠의 제작 · 유통 다변화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이 펀드를 기반으로 고화질(HD)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투자활동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케이블 PP들은 정책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서는 펀드 규모를 더 키우고 경쟁력 있는 PP나 독립제작사를 선별 지원하는 등의 정책 판단이 요구된다고 지적한다. 업계 관계자는 "케이블 방송채널의 경우에도 프로그램 제작단가가 장르에 따라 회당 평균 2500만~5000만원"이라며 "1000억원 규모의 방송콘텐츠 펀드로 제작비 조달에 곤란을 겪고 있는 PP들을 지원하려는 것은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방송콘텐츠 제작 비용에 대한 세제 혜택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장원 실장은 "방송콘텐츠 창작을 일반 기업의 연구개발(R&D) 활동으로 간주해 방송콘텐츠 제작과 관련된 비용에 대해서는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도 강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