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 돌아 자연 들여다 보니 삶의 답이 있더군요"

새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 출간한 김훈 씨
"나더러 '마초'라고들 하던데… 글쎄요. 내 속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여자가 있나봐요. 세상에 나오려고 징징거리는 여자."

1년 만의 신작 장편 《내 젊은 날의 숲》(문학동네)에서 왠지 모를 여성성이 느껴진다는 말에 소설가 김훈씨(62 · 사진)는 이렇게 대답했다. 11일 오전 일산의 집필실에서 만난 그는 한층 여유롭고 부드러워진 모습이었다. 대표작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등에서 간결하고 힘있는 문장을 구사해온 그가 이번에는 미술학도 출신의 젊은 여성 화자(조연주)의 눈으로 자연과 사람을 그려냈다.

작년 가을부터 올 여름까지 휴전선을 따라 여행하며 쓴 이 작품에서는 강렬한 인물상이나 줄거리 대신 고요하고 청명한 이미지가 도드라진다.

실직한 '나'는 휴전선 동부전선의 민간인통제선 안쪽에 있는 국립수목원에서 식물을 그리는 계약직 세밀화가로 취직하고 우연히 6 · 25 유해발굴단이 찾아낸 유골을 그리는 일까지 떠맡는다. 나무와 꽃,인골을 번갈아 바라봐야 하는 나는 지방공무원으로 재직하다 뇌물죄와 알선수재죄로 수감된 아버지, 그런 아버지로부터 돌아서려는 어머니를 가족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유해발굴 사업에 참여하는 김민수 중위,이혼 후 자폐 성향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안요한 실장과 만난다.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며 여행 산문집을 냈던 작가는 나무사전이나 수목생리학 서적을 찾아 읽으며 현실 속의 자연을 한층 밀도있고 생생한 언어로 빚어냈다. 숲의 내음을 연상시키는 묘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나무줄기의 중심부는 죽어 있는데,그 죽은 뼈대로 나무를 버티어주고 나이테의 바깥층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난다. 그래서 나무는 젊어지는 동시에 늙어지고,죽는 동시에 살아난다…(중략) 나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 '(215쪽)

그는 자연이 참 난해한 것이라고 했다. 물과 바람,강물과 노을은 모두 도덕이나 윤리,가치와는 상관없는,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물리현상인데 그것들이 인간을 위로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스스로 그러하기(自然)' 때문이고 내 안에 자연이 있기 때문이겠죠.증명할 순 없지만 우리 안에 있는 숲과 바람이 밖의 자연과 교감하는 거예요. "

그는 자연과 전쟁,인간,현대화의 야만성을 포개놓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밥벌이에 몰두해 뇌물을 상납받던 파렴치범 아버지는 매일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현실 속의 인물"이라며 "허상에 가득찬 남성상,남자들이 세상과 맞서는 고통,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삶의 모습 등을 여성의 눈으로 스케치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소설가로서의 삶도 벌써 11년째다. 그러나 그는 "신인을 겨우 벗어나기 시작하는 시기"라며 겸손해한다. 이번 소설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는 "그동안 단 한번도 '사랑'이나 '희망' 같은 단어를 써본 적이 없다. (중략)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갈구한다"고 적었다.

"김 중위가 제대를 하면서 여자한테 명함 한 장을 건네잖아요. 하찮고 빈약한 증거물인 것 같지만(희망으로) 조금씩 발전하는 도구이지요. 명함 한 장의 의미를 독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