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과학은 배제된 '과학비즈니스벨트'
입력
수정
정치논리 휘둘린 입지선정은 '독'세종시로 상처를 입은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또 다시 끝없는 정치적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누구나 정치 논리를 배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정작 배제된 것은 정치 논리가 아니라 과학이다. 도대체 '중이온가속기'가 무엇이고,'기초과학연구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과학비즈니스벨트는 3조5000억원짜리 지역개발 사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기초과학육성 본래 취지 살려야
과학기술계가 나설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도 외면하고,임기의 절반 이상을 허송세월해버린 정부를 믿고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 눈먼 표에 정신이 팔려있는 정치권도 신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발족되고,'입지선정위원회'가 가동된다고 문제 해결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국가위의 '명예위원장'을 자처한다고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거품을 걷어내는 노력이 절실하다. '국제'와 '과학'과 '비즈니스'와 '벨트'의 조합 자체가 정치적 거품이었다. 기초과학에서 국제화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기초과학과 비즈니스의 결합도 어색한 것이다. 기초과학을 앞세우면서 노벨상을 들먹이는 것도 유치한 발상이다. 가속기와 문화예술이 어우러진 '은하도시'의 소박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과학기술계의 자발적 노력과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이온가속기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중이온가속기가 우리 기초과학의 상징이 돼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기초과학 투자를 중이온가속기로부터 시작하면 안 된다는 이유도 없다. 가속기가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지만,반대로 최악의 선택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제 가속기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두고,가속기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기초과학 투자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기초과학연구원의 구상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온갖 아이디어들을 미사여구로 포장해 놓은 현재의 구상은 신도시 개발 계획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어떤 기초과학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알맹이는 빠져버린 속 빈 강정이다. 그렇다고 난상토론으로 낭비할 여유는 없다.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과학기술계와 우리 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역량과 안목을 가진 리더들을 발굴해서 모든 것을 맡기는 방법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 인선에서 정치적 고려는 치명적인 독약이다. 물론 외국의 퇴직 과학자를 활용하겠다는 비굴한 발상도 버려야 한다.
입지에 대한 조건도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단기적으로 지역 경제에 혜택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과학비즈니스벨트가 진짜 성공해야 우리 모두의 미래가 보장된다. 장기적 안목에서 과학비즈니스벨트의 입지는 지역이 아니라 과학비즈니스벨트의 입장에서 선정돼야만 한다는 뜻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도 바꿔야 한다. 미래 기술 개발 가능성과 노벨상을 들먹이는 것은 기초과학을 폄하하는 것이다. 기초과학은 선진국 진입을 꿈꾸는 우리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책임이고 의무다. 기초과학 투자는 그동안 우리가 받은 혜택을 돌려주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 과학기술계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정당의 경선 과정에 줄을 서고,국회 앞에서 시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학기술계가 또 하나의 정치적 이익 집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과학기술의 정치적 중립은 지켜져야 한다. 현대 과학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합리성 개방성 민주성의 위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높은 수준의 정치력을 보여줘야 한다.
이덕환 <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