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이장호 부산은행장, 스킨십으로 고객마음 얻는 '네트워킹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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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安住 넘어 '새로운 도전' 꿈꿔
기득권 버리면 기회 온다
韓銀·외환은행 박차고 부산으로…국제금융통으로 최고 자리 올라
욕심 가지면 신뢰 못 얻어
10년간 만나도 영업얘기 안꺼내…기업대표가 먼저 "거래하고 싶다"
"이제 막 부실 상태에서 벗어난 은행에 어떻게 돈을 맡기고 거래를 합니까?"
2000년 부행장보로 승진한 이장호 부산은행장은 승진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어디를 가나 고객들로부터 이런 항의를 들어야 했다. 부산은행은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경영개선 권고를 받았다. 2000년은 경영개선 권고에서 벗어난 지 6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부실 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상황이다 보니 이런 항의를 듣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런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이 행장이 찾은 돌파구는 부산시금고 유치.자신이 직접 시금고 유치 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부산시금고는 수십년째 한빛은행(옛 상업은행 · 현 우리은행)이 독점해온 터여서 다른 은행은 넘볼 수 없는 '성역'처럼 여겨졌다. 부산은행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라며 말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 행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산시청의 시금고 담당 말단 직원부터 시장까지 모두 만나 설득에 나섰다. 국회의원과 지역 기업인 등 자신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지방은행인 부산은행이 살아야 지역 경제가 산다"며 읍소 작전도 펼쳤다. 그 결과 한빛은행을 제치고 시금고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 행장은 40년 남짓 은행원 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시금고 유치를 꼽는다.
◆기득권 버렸더니 기회가 찾아오더라이 행장은 1965년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한국은행에 입행했다. 당시 한국은행은 대학 졸업자뿐 아니라 전국 상고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선망의 직장이었다. 이 행장은 2년 뒤 한은 외환업무 부문이 외환은행으로 분리되면서 자리를 옮겼다. 부산은행에 합류한 것은 1973년 10월.국제금융 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선배(당시 부산은행 상무)의 권유로 결단을 내렸다.
물론 동료와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한국은행과 외환은행은 당시 최고의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장은 "당연히 목표는 최고 자리인 은행장이었다"며 "은행장이 돼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부산 경제와 금융에 기여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이직 이유를 밝혔다. 그는 "한국은행이나 외환은행에서 계속 근무했다면 편하게 살 수 있었겠지만 지금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다"며 "과감한 도전과 결단이 있었기에 부산은행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행장은 "요즘은 서울 명문대학 졸업자들이 부산은행에 지원하는 사례가 늘 정도로 지방은행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며 "서울 수도권의 큰 조직에서 일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지방 조직과 지방 회사들도 우수한 인재를 필요로 한다"고 인재들의 지방 유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마음이 통해야 인간관계가 넓어진다
이 행장의 별명은 흔하디 흔한 '마당발'이다. 한번 이 행장을 만나본 사람들은 누구든 그의 친화력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 행장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은 당장에는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묵묵히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무슨 일이든 열정을 쏟다 보면 인정받게 돼 있습니다. 또 항상 자신을 낮추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욱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공자님 말씀 같아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넓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인간관계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한두 번 만남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번 만나다 보면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생기고 깊이 있는 교류를 하게 된다"면서 "서로 신뢰가 쌓인 관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영업으로 연결되고 언제 어디서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로 발전한다"고 말했다.
1982년 이 행장이 국제금융부 차장으로 근무할 때 한 원양어업 회사가 부도났다. 담보로 잡은 선박에 어업허가권이 없어 담보가치가 낮았다. 피해액도 커질 상황이었다. 은행원으로서 큰 오점을 남길 순간 거래처가 자발적으로 도움을 줬다. 선박 전체를 인계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평소 정성을 다해 거래처를 대했더니 정말 어려운 순간에 도와주더라"는 게 이 행장의 회상이다. 그는 "남들에게 베풀고 배려하면 공덕이 돌아온다"며 "당장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인생의 채권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뢰 쌓으면 경영 실적도 좋아진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이 행장의 신뢰 경영이 빛났다. 당시 은행들은 정부 방침에 따라 대출 만기를 일괄적으로 1년 연장했다. 다른 은행들은 기한을 연장해주면서 대출의 5~10% 정도를 갚도록 했다. 하지만 부산은행은 대출액 전체를 연장해줬다. 부산지역 기업들은 "금액은 얼마 안 됐지만 정말 어려운 때여서 큰 도움이 됐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덕분에 다른 지방은행들이 고전하는 와중에도 뛰어난 실적을 거둬 이 행장은 2008년부터 작년까지 3년 연속 한국경제신문이 제정한 '다산금융인상'을 수상했다.
이 행장은 최근 거래를 시작한 기업인 얘기도 들려줬다. "10년 전 매출 1000억원대인 부산지역 기업의 대표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만나 밥 먹고 술도 마셨지만 은행 거래 얘기는 한마디도 안 했죠.그 대표가 10년이 지난 최근에 부산은행과 거래하고 싶다는 연락을 스스로 해 왔습니다. "
그는 "영업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덤비면 될 일도 안 된다"며 "우선 마음이 통하고 신뢰를 얻어야 기업과 은행이 함께 갈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고 강조했다. 또 "현대사회는 인맥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며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데 돈과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행장은 최고경영자(CEO)가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가장 큰 덕목도 '인맥 관리'라고 역설했다.
◆뼛속까지 부산사람,은퇴 후 부산에서 봉사
이 행장은 "요즘은 고객 또는 동료 직원들과 전화,온라인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시대지만 그렇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 보고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은행에서 외부 강사 초청 강연을 들을 때도 직원들에게 같은 부서나 동기들 옆에 앉지 말고 전혀 모르는 직원들과 앉도록 자리를 배치하라고 지시한다. 직원 간 스킨십을 늘리기 위해서다.
이 행장은 1947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중심인 서면 로터리 인근에서 자랐다. 지금도 어머니가 그곳에 살고 있다. 한국은행과 외환은행에서 보낸 8년과 1998년 서울지점장 시절 1년을 제외하고는 부산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 행장은 "부산은행이 있는 부산은 나에게 삶의 터전이자 기회를 준 곳"이라며 "은퇴 후에도 부산에서 계속 살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2년까지 남은 임기 동안 CEO로서 역할을 충실히 한 후 은퇴하면 지역경제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며 살겠다는 목표를 세워놨다.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지역사회에 다시 환원하고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로 인생의 2막을 열 계획이다.
지방이 여러 면에서 열악하지만 특히 문화 예술이 취약하다는 게 이 행장의 생각이다. 그는 "영화를 제외한 음악 연극 등 예술 공연은 지방까지 오면 교통비 숙박비와 시간까지 따져 수도권보다 거의 2배 비용이 들어 전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문화 예술 분야에서 기업 메세나 활동을 늘리는 데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은행장이 은퇴 후에도 부산지역을 위해 일하면 은행 이미지도 좋아질 것 아닙니까. " 이 행장은 '부산 사나이'였다.정재형 기자 j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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