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애타는 기다림 후…동백정에 해가 피어났다

● 충남 서천(下)

마량포구 일출·일몰 감상…여행객에 여유를 선사하고
서천수산물시장 활기 넘쳐…어물전 할머니 말투 정겹네
동백꽃 향기 퍼질 봄 오면 제철 만난 주꾸미 물 올라

금강하굿둑을 넘어 서천으로 들어선다. 서천이란 작은 냇물들이 펼쳐진 풍경이 수려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서천읍 남쪽에 가로로 길게 뻗은 남산(147m) 기슭의 남산성으로 향한다. 21세기의 대표적인 유적(?)인 KBS 중계탑을 지나자 허물어진 성벽이 나타난다. 성의 서문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산 정상에 토성을 쌓고 바깥에 또 석성을 이중으로 쌓았지만 610m가량의 성벽 가운데 지금은 겨우 몇십m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산 아래를 굽어보니 금강으로 침투하는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좋은 위치다. 군사리 서천향교에 들른 후 비인만의 끝 마량포구로 향한다. 서면 소재지를 지나자 35㎞에 이르는 서면의 긴 해안선이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낸다. 물 빠진 갯벌에 세워진 무수한 김양식 지주들이 마치 설치미술 작품 같다. 마량포구선착장으로 가는 길에는 성경전래지비가 서 있다. 마량진 갈곶은 1816년 순양함을 타고 서해안을 탐사하다 표류한 영국 해군 머레이 맥스웰 대령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건넨 곳이다.

《순조실록》 19권은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다'고 적고 있다. 이 '전자(篆字)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는' 글자로 쓰여진 책이 바로 성경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바실 홀이 쓴 《조선의 서해안과 대(大)류큐섬 발견 항해기》(1818년)에도 기록돼 있다.

◆기다림을 품은 사람은 누구나 동백이다비인만의 끝에 자리 잡은 마량포구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해돋이는 동짓날을 중심으로 50일 전후에만 한시적으로 볼 수 있다. 겨울날의 마량항엔 쓸쓸함과 한가함이 동거하고 있다. 선착장에는 4월 말부터 시작될 넙치잡이를 기다리는 배들이 무심히 볕바라기를 하고 있다.

서면 해안의 갯벌은 거의 모래갯벌이다. 어선들은 물고기를 유인하는 길그물의 끝에 직사각형의 통그물을 놓는 형태의 각망을 설치해 모래 갯벌에 알을 낳기 위해 몰려드는 넙치(광어)나 도미를 잡는다. 김 채취 작업선이 누렇게 황백화한 물김을 버리는 풍경이 보인다. 이곳 어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인 김양식은 올해 황백화 현상으로 완전히 망쳤다고 한다.

서천화력발전소 옆,500년 전에 조성했다는 마량리 동백숲으로 간다. 80여 그루 동백나무들이 으슬으슬한지 제 꽃봉오리를 단단히 여미고 있다. 1965년 한산군 관아의 목재를 옮겨다 지은 동백정에 오른다. 옛날에 장수가 바다를 건너다 신발 한 짝을 빠뜨린 게 섬이 되었다는 오력도와 오래도록 눈을 맞춘다. 섬이 마치 한 마리 우럭처럼 파닥인다. 방파제 앞 너럭바위에선 한 남자가 플라이 낚시를 던지고 있다. 이 근방 바다에선 우럭 놀래미 감성돔 등이 잘 잡힌다고 한다. 이제 곧 동백꽃이 피기 시작하면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주꾸미가 산란을 위해 바다를 거슬러 올라오리라.소라그물(소라방)을 바다에 던져놓고 주꾸미를 잡으려는 어부들의 기다림도 끝이 나리라.동백꽃의 꽃말은 기다림 혹은 애타는 사랑이다. 아마도 마량항 어부들은 자신들도 동백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끝내 깨닫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날 것이다.

◆'평화로운 풍경의 종결자' 홍원항

마량포구에서 띠섬해수욕장까지 활처럼 휘어져 굽이치는 해안선을 바라보며 도둔리 홍원항으로 간다. 홍원항은 후망산 동북쪽 기슭 아래 형성된 바닷가 마을이다. 이 작은 항구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방파제와 어선,등대 등이 남의 영역을 넘보지 않는 무욕의 금도를 지키는 까닭이다. 이곳에선 서해의 거센 바닷물까지도 애써 조수간만의 차를 줄인 채 슬금슬금 드나든다. 홍원항의 아이콘은 전어다. 전어는 난바다에서 생활하다가 10월이 오면 연안으로 이동해 이듬해 5월까지 죽치면서 3~6월께 산란기가 되면 얕은 바다에 산란한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을 전어는 구수하다. 선착장 한켠에선 나이 지긋한 아낙과 남편이 뱃머리에 걸터앉아 그물을 손보고 있다. 날씨가 춥다고 함부로 쉴 수 없으니 삶이란 얼마나 지엄한 시어머니인가.

예전엔 백이 · 평원 · 뒷개 등으로 불리던 춘장대해수욕장으로 간다. 겨울 해수욕장은 사색과 침잠에 잠기기 좋은 선원(禪院)이다. 백사장이 온몸으로 공(空)을 체득 중이다. 잠시라도 나태한 기미가 보일라치면 파도는 백사장 어깨에 즉각 '쏴~ 쏴~' 소리의 죽비를 내리친다.

'춘장대 선원'을 떠나 비인면 탑성이 마을,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은 성북리 오층 석탑으로 걸음을 옮긴다. 수평의 끝에서 제 몸을 살포시 들어 올린 지붕돌들에서 작은 비상감을 느낀다. 이미 사라진 백제계 석탑 양식을 이곳에 재현한 고려의 석공은 온고지신의 뜻을 아는 자다. 서천읍 서천수산물 특화시장은 제법 활기가 넘친다. 물메기 백합 소라 등이 주류를 이루는 이 어물전의 주인들은 대부분이 할머니다. 그래서인지 흥정도 급박하지 않고 말씨도 느긋하고 정겹다.

◆늙은 항구는 아직도 옛 영화를 꿈꾸고

1939년에 읍이 된 늙은 항구 장항으로 간다. 1934년부터 2009년 11월 말까지 75년을 이어온 뱃길이 끊긴 옛 도선장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예전 이곳에서 배를 타고 15분가량이면 군산에 닿았다. '뽈테기(대구 머리)'찜 집이 된 채 홀로 선창가를 지키는 도선터미널 건물이 '안습'이다.

송림삼림욕장으로 가는 길목,장암지하차로 위에 얹힌(?) 서천장암진성(1514년)에 오른다. 둘레 640m밖에 되지 않는 역사다리꼴의 작은 성이다. 성 아래 한솔제지 장항공장 굴뚝이 봉화처럼 연기를 뿜어낸다. 옛 장항제련소 옆을 지난다. 한때 내 방랑벽을 부추겼던 거대한 굴뚝은 연기를 내뿜지 않은 채 쉬고 있다.

이윽고 송림 백사장에 닿는다. 장암진으로 유배왔던 두영철이란 고려시대의 벼슬아치가 이 백사장에서 찜질로 건강을 되찾았다고 전하는 백사장이다. 이곳의 모래는 염분 철분 우라늄 등이 풍부해 신경통과 관절염에 좋다고 한다. 해가 점점 수평선 가까이 내려온다.

저녁 해는 과감한 터치를 구사하는 화가다. 수평선 위의 허공엔 오로지 자신만을 남겨둔 채 일체를 생략해 버린다. 저녁 해가 거침없이 마지막 빛살을 쏘아댄다. 빛살들에 맞은 나그네의 가슴은 지체없이 낙조의 쓸쓸함을 나른한 혈관 속으로 흘려보낸다.

홍순관의 노래 '성모형'이 떠오른다. '노을이 물들어 서산에 해지면은/ 부르던 그 노래도 고향집으로 갈까/ 이 세월이 가면 고운 노래도/ 시간에 흩날리어 찾을 수 없게 되오/ 성모형 지금이야 우리가 부를 노래/ 아버지 들려주던 그 노래를 부르오.' 건너편 군산산업단지의 공장들이 하나둘 불을 켜기 시작한다.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서해안 최대 해양박물관, 바다생물 15만점 전시…통통하게 알 밴 주꾸미, 쫄깃하고 고소한 맛

◆ 여행정보

서천해양박물관은 키가 1~2m에 달하는 식인조개 등 조개류,멸종 위기에 처한 장수거북과 투구게 등 갑각류,바다의 꽃이라 부르는 산호류,어류 박제,화석류 등 약 15만여 점에 달하는 바다생물을 전시한 서해안 최대의 해양박물관이다. 1층의 생태체험관(수족관)에서는 해수어(리본뱀·팬더피피 등)를 비롯해 까치상어 철갑상어의 수중생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으며 터치풀에선 게 뱀장어 우럭 삼세기 등을 만져볼 수 있다.

2층의 공룡탐험관에선 실물과 똑같이 제작돼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애니메트로닉 로봇 공룡들이 생생한 체험을 안겨주며 화석관에선 1억~5억년 전 어패류,식물,광물,곤충의 화석과 만날 수 있다. 개관시간은 하절기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 오전 9시30분~오후 5시.입장료 7000원.

◆ 맛집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 벽에는 엮인 시래기// 시래기에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안도현 시 '갱죽')

갱죽이란 콩나물과 김치,혹은 삶은 무청 시래기 따위를 숭숭 썰어 희멀겋게 끓인 죽이다. 전라도로 치면 시래기죽과 비슷한 경상도식 죽이다.

어릴 적 양식이 부족한 겨울철이면 시래기를 듬뿍 집어넣은 죽이 밥상머리를 차지하곤 했다. 갖은 먹을거리로 넘쳐나는 요즘엔 겨울이 와도 시래기죽이나 갱죽을 끓여 먹는 집은 없다.

담백한 먹을거리가 삶을 청빈하게 만들어주던 시절이었다. 바야흐로 주꾸미의 계절인 봄이 돌아오고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주꾸미를 '죽금어'라 부르면서 '크기는 4~5치에 불과하다. 모양은 문어를 닮았으나 다리가 짧다. 겨우 장어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생김새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3월부터 5월 사이,산란기가 되면 통통하게 알이 밴 주꾸미의 살은 한층 쫄깃쫄깃해지고 맛있어진다. 마량 앞바다에서 소라 껍데기를 이용해 산 채로 잡은 싱싱한 주꾸미 맛은 고소하기 그지없다. 마량항에선 해마다 동백꽃·주꾸미 축제를 여는데 올해는 오는 26일부터 내달 8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정 들머리에 있는 서산회관(041-951-7677)은 주꾸미 철판 볶음으로 잘 알려진 집이다. 주꾸미 철판 볶음 3만~5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