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 기행] 척박한 땅에 꽃피운 예술…슬픈 러브스토리 무대엔 고대 문명의 자취만이…

● 카를 로트만의 '시키온과 코린트'

전쟁에 희생된 사랑처럼 역사 속 사라진 약소국 '시키온'
그리스 문화 발상지로 꼽혀

역사 명소 23점 연작 중 하나
극적인 색채의 콘트라스트…대자연 역동적 존재감 그려내
시키온의 한 여인은 코린트의 젊은이를 사랑했다. 오랫동안 사랑을 키워온 두 사람은 마침내 백년가약을 맺기로 약속하고 다가올 행복의 순간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나 둘은 뜻하지 않은 사태로 파국을 맞는다. 남자가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 출정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 운명의 여신의 질투를 자아냈음에 틀림없다. 소식을 접한 여인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 만남의 날 여인은 남자의 모습을 영원히 기록하기로 한다. 그녀는 남자의 손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여인은 남자를 어두컴컴한 실내로 안내한 후 그의 얼굴을 향해 등불을 비췄다. 남자의 모습이 그날따라 벽에 짙고도 슬픈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공인 여인의 아버지 디부다테스는 청년의 그림자를 따라 벽 위에 윤곽선을 그렸다(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이것을 회화의 기원으로 보았다). 도공은 그 윤곽선을 진흙 타일에 옮겨 그린 후 가마에 구웠다. 여인은 그렇게 타일에 포착된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을 견뎌냈다.

로마시대의 과학자이자 자연철학자인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나오는 얘기다. 이 슬프고도 안타까운 러브스토리의 무대가 된 시키온은 아테네와 함께 고대 그리스 문화의 발상지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 아테네가 철학의 발상지라면 시키온은 회화와 조각을 비롯한 예술의 발생지로 간주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스 고전시대의 명품 조각들과 회화의 잔편들은 아리스토클레스(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인물) 같은 시키온의 선구적 예술가들에 의해 그 바탕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리스 시대 최고의 화가로서 색채와 드로잉 기법을 완성한 아펠레스도 시키온 출신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오직 아펠레스만이 자신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고 선언할 정도로 그의 실력은 발군이었다. 오죽하면 그가 그린 아프로디테상이 훼손되자 다른 화가들이 감히 보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전할까. 미술뿐만이 아니었다. 시키온은 비극의 발상지로도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초일류 문화국가였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의 코린트와 아케이아 사이에 있는 시키온은 기원전 7세기에 코린트만의 삼각주 위에 건설됐는데 목각이나 청동주조업의 중심지로 에게해 주변에 이름을 떨쳤다. 이런 문화적 성취와는 반대로 정치적으로는 늘 코린트나 스파르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약소국이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일원으로 코린트나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전쟁에 군말 없이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해야만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안타까운 사랑 얘기의 주인공들도 그러한 도시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보이지 않는 희생자였다. 2세기에 코린트가 멸망하자 시키온은 잠시 정치적 독립을 이루지만 이내 로마제국의 수중에 떨어지고 이후 쇠퇴를 거듭한 끝에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만다.

이 잊혀진 인류 문화의 요람이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 초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배경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당시 시키온을 포함한 그리스의 옛 영토는 바바리아 왕 루드비히 1세(재위 1825~1848)의 둘째 아들인 오토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루드비히 1세는 자신의 정치적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뮌헨의 왕실 정원인 호프가르텐의 아케이드를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아들의 통치 지역인 그리스의 풍광을 담은 벽화들로 장식할 야심찬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이 대역사를 맡은 인물은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화가 카를 로트만(1797~1850)이었다. 그는 먼저 1826년과 1827년 이탈리아를 방문,28점의 스케치를 토대로 벽화를 제작해 루드비히 1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이탈리아 시리즈에 입이 벌어진 왕은 그리스 풍경화의 제작도 로트만에게 일임한다. 화가는 이를 위해 1834년 그리스로 떠나 아테네,스파르타,마라톤 등 고대의 역사적 명소들을 화폭에 담았다. '시키온과 코린트'는 그때 제작된 23점의 연작 중 하나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두 역사적 명소를 마치 지형도를 그리듯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자연의 신비한 정신과 웅혼한 기상을 표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바리아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푸른 하늘과 붉은 대지가 만들어내는 극적인 색채의 콘트라스트,삼각주의 단층이 만들어내는 수직선과 멀리 보이는 풍경이 자아내는 수평선의 대비는 대자연의 역동적인 존재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그림에 보이는 오른쪽 평평한 삼각주 위의 마을은 시키온의 옛 자취인 듯하며 그 뒤로 보이는 푸른색 톤의 산악지역은 코린트임에 틀림없다. 강우량이 적어 올리브 말고는 식물이 꽃을 피우기 어렵지만 그런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예술의 꽃을 피웠던 시키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끝 모를 오수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 덧없는 역사의 현장에서 지팡이를 짚은 한 남성이 시름에 잠긴 채 실개천을 응시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잔잔히 들려오는 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플리니우스가 전해 준 시키온 여인의 처연한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의 제작 의도는 정치적이었지만 그 결과물은 잊혀진 고대문명의 아름다운 영화를 추억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