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Story] 韓銀에 미술품 1300여점 있는 까닭

● '명화의 보고' 한국은행

미술가 지원·화폐 도안 위해 50년대부터 수집
천경자·이상범·엄태정 작품…기증작도 많아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관 1층에 들어서면 '물가안정'이라는 대형 글씨를 새긴 벽면이 눈에 들어온다. '물가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한다'(한국은행법 제1조)는 중앙은행의 권위를 상징하는 네 글자다.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물가안정' 아래 그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로 7m,세로 4.5m 크기의 부조작품이다. 여러 사람이 손을 잡고 뛰어가는 모습을 회색빛 석조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한국 추상조각의 1세대 작가 중 한 명인 엄태정 서울대 명예교수의 작품 '번영과 영광'이다. 한은은 1987년 12월 신관 건물을 완공하면서 이 작품을 구입해 1층 로비에 걸었다. 통화량 관리와 경제 전망 및 분석을 주된 업무로 하는 한은은 미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한은은 웬만한 미술관이나 박물관 못지않은 '명화의 보고'다. 한은은 한국화 등 동양화 625점,서양화 396점,서예 225점,조각 46점 등 1300여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1100명가량인 한은 본점 임직원 수보다 소장 중인 미술품이 더 많은 셈이다.

덕분에 한은에서는 곳곳에서 다양한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총재실과 금융통화위원실은 물론이고 벽에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사무실이 없다. 마땅한 전시공간이 없어 1층 창고에 보관 중인 작품만도 60여점이다.

한은이 미술품을 사들인 건 1950년대부터다. 당시 정부는 가난한 미술가들을 돕자는 취지로 관공서를 비롯한 공공기관과 은행이 미술품을 구입하도록 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문화예술진흥법이 미술품 구입의 근거가 됐다. 문화예술진흥법 9조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때는 건축비의 0.5~0.7%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미술품을 사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은은 본관 및 별관을 신축할 때마다 미술품을 사들였다. 업무상 필요에 따라 미술품을 사기도 한다. 한은은 2008년 2월 이종상 화백의 신사임당 초상화를 매입,이 그림을 토대로 5만원권 도안을 만들었다. 한은이 미술품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호가들이 기증한 작품도 적지 않다.

한은이 보유한 미술품 중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도 많다. 총재 집무실에 있는 이상범의 '야산귀로'와 공보실에 있는 천경자의'공작새'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한은이 미술품을 팔아 돈을 번 적은 없다. 중앙은행이 미술품 매매로 이익을 얻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용주 한은 조달관리팀장은 "소장 중인 미술품이 시가로 얼마나 되는지는 감정평가를 해보지 않아 알 수 없다"며 "도난 · 분실 등에 대비한 보험료로 지출하는 비용은 연간 1000만원에 못 미친다"고 말했다.

전시를 위해 외부에 미술품을 빌려주는 일은 있다. 한은 스스로도 보유 작품을 활용해 전시회를 연다. 한은은 화폐금융박물관 2층 한은갤러리에서 지난달 10일부터 내년 5월6일까지 풍경화를 주제로 한 '한국의 수변풍경전'을 개최한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