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Story] '킬링필드ㆍ인종청소' 한국인이 재판한다

● 세계가 인정한 한국 사법부

정창호 판사, 유엔 전범재판소 재판관으로 선임
송상현ㆍ권오곤ㆍ박선기 등 국제 재판관 4명 배출

"축하합니다. " 정창호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44 · 사법연수원 22기)에게 최근 한 통의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발신처는 유엔본부 법률국.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ECCC) 재판관으로 뽑혀 축하한다는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8월1일부터 캄보디아에서 열리는 재판관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저것 출국을 위해 준비할 시일이 촉박했지만 정 판사는 쾌재를 불렀다. 2008년부터 주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사법협력관으로 있으며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에 적극 참여하는 등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정 판사는 예심-1심-2심으로 이어지는 ECCC 재판부에서 예심 재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예심은 본안심사에 앞서 검찰이 제시한 증거나 절차의 적법성을 가리는 곳이다. 1975~1979년 폴 포트가 이끄는 무장단체 크메르루주에 의해 200만명가량(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 700만명)을 학살한 사건(킬링필드)의 세기적 재판에 한국인 판사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정 판사의 ECCC 재판관 임명에 대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권오곤 구(舊)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ICTY) 부소장은 31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국제 형사재판업무에 4명의 재판관을 낸 국가가 몇 곳이나 있나. 한국 사법계의 쾌거다"라고 기뻐했다.

정 판사가 속한 ECCC는 프랑스식의 대륙법적 재판절차를 택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국제형사재판소(ICC),ICTY,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 등 기존 대부분의 국제형사재판은 주로 영미법에 따르고 있다. 권 부소장은 "구술심리주의에 의존하는 영미법적 제도로는 복잡 다기한 국제 형사재판을 다루기에 적당치 않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며 "대륙법적인 접근을 하는 ECCC의 경험은 국제 형사재판뿐만 아니라 같은 대륙법 계통인 국내 형사재판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국제 형사재판에서 활약 중인 한국인 재판관은 송상현 ICC 소장과 권 부소장,박선기 ICTR 재판관(2003년 임명),정 판사 등 총 4명.이들 중 국제 사법계에 한국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데 가장 기여한 인물은 송 소장이다. 2002년 최초의 상설 국제 형사사법기관인 ICC 초대 재판관에 선출된 이후 2006년에는 9년 임기 재판관에 재선됐고,2009년에 소장으로 임명돼 한국인 최초로 국제 사법기구 수장에 올랐다. 최근에는 민주화 시위 중이던 민간인을 유혈진압한 혐의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바 있고,연평도와 천안함 사건 조사에 착수함으로써 김정일을 법정에 세울 수 있을지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다. 송 소장은 "정 판사의 임명은 법조인뿐 아니라 다른 직역의 많은 한국인이 국제기구에 진출하는 데 커다란 구체적 목표를 제공해주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유고 내전(1992~1995) 당시 '인종 청소'(25만명 사망)를 자행한 혐의로 기소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 재판에 이어 1급 전범 라도반 카라지치 사건의 재판장을 맡고 있는 권 부소장은 후배 법조인과 로스쿨생들에게 "국제 재판소에서 일하려면 국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스펙을 쌓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