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기행] 기하학적 자연 풍광에 살포시 내려앉은 빛, 넋을 잃을 만큼 강렬한 사색 속으로 이끄는데…

● 폴 세잔의 '에스타크에서 바라본 마르세유만'

모노톤의 하늘, 원뿔처럼 솟아 있는 산
마름모꼴 형태의 집, 무심한 듯 펼쳐진 푸른 바다

회화적 진실을 찾아 고독한 실험에 빠져든 화가
드디어 견고한 형태감과 色의 효과를 중시한 추상미술의 서막을 열고

오베르 시르 우아즈에 살던 인상주의의 맏형 피사로가 어느 날 파리 나들이를 가자며 세잔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마네가 주도하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세잔으로서는 영 내키지 않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존경하는 '왕형'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까칠하기로 말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던 세잔은 그렇게 마네가 주도하는 바티뇰 그룹의 멤버가 됐다.

그런데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의 비위를 뒤집히게 만들었다. 이 튀는 그룹의 리더인 마네는 깔끔하게 다림질한 신사복을 차려입은 다소 젠 체하는 댄디형의 인물이었고 요란스런 복장을 한 드가는 멤버들의 의견에 툭하면 으르렁대며 토를 달았다. 꾸미지 않은 털털함을 미덕으로 알았던 세잔으로선 이 도회적인 반항아들의 외모치장이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으로 비쳐졌다. 세잔의 차림새는 세련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사로가 소맷부리를 잡아당겼을 때 그는 그저 평소에 쓰던 촌스런 모자 하나를 머리 위에 얹었을 뿐이었다. 옷에는 여기저기 그림을 그리다 흘린 물감들이 무질서하게 자국을 남기고 있었지만 그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본 마네와 드가가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음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배짱 좋은 세잔은 그런 상황에 순응하기는커녕 되레 거친 언사를 쏟아내며 토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일쑤였다.

이 외골수 화가의 면모는 소싯적부터 남달랐다. 세잔은 부모의 말에 순응하는 고분고분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고집불통이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도이기도 했다. 그는 친구들한테 이지메를 당하던 에밀 졸라를 구원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세잔은 자신이 한번 결정한 일은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에 마지못해 ?C대의 법과에 등록하긴 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갈망을 단호히 뿌리친 채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세잔이 훗날 서양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고집스러운 성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다수의 인상주의자들이 화가의 눈에 비친 대상의 순간적인 인상을 재현하는 데 몰두했던데 비해 세잔은 그것이 고전 미술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견고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는 빛의 순간적인 느낌을 좀 더 견고한 형태 속에 담을 수는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잔은 그러한 견고한 화면은 자연의 외형이 아닌 본질을 묘사할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은 원추,원통,원구(圓球) 등 기하학적인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나무의 둥치는 원통이요,그 가지에 달린 과실은 원구요,사방으로 날개를 펼친 나무의 모양새는 원뿔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잔의 이러한 생각은 우주자연의 겉모습보다는 본질적인 모습을 묘사하려 한 동양의 회화정신과 유사한 것이어서 흥미롭다. 세잔 회화의 출발점은 전통회화였지만 그 귀결점은 전통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다.

세잔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1877년 제3회 인상주의전을 끝으로 그는 아예 파리를 떠나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엑상프로방스,에스타크 등에 은둔하면서 회화적 진실을 찾기 위한 '고독한 실험'에 빠져든다. 어린 시절 친구로 파리에서 문학가 겸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졸라에게 그런 옛 친구의 지리한 탐구 과정은 의욕은 있지만 재능은 모자란 삼류 화가의 전형으로 비쳤다. 졸라는 1886년 출간한 자신의 소설 《작품》 속에서 예술적 재능의 한계를 비관해 자살하는 비극적 주인공을 세잔에 비유함으로써 친구의 마음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세잔은 결국 졸라와 결별을 선언하고 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화가의 마음을 달래준 건 오직 나무와 풀벌레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집스러운 시도는 마침내 세상의 인정을 받아 세잔은 근대 서양미술사의 빛나는 별이 된다.

'에스타크에서 바라본 마르세유만'은 세잔이 파리 화단을 떠나 프로방스 지역에 거주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다. 그는 1870년 이후 마르세유 부근의 작은 어항인 에스타크를 즐겨 방문했는데 이곳은 르누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 그림은 자연을 기본적인 기하학적 요소로 단순화할 수 있다고 본 세잔의 생각이 뚜렷이 드러난 작품이다.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상단에는 모노톤의 하늘 아래 산들이 마치 원뿔처럼 솟아 있고 그 아래로 푸른 바다가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맨 아래쪽에는 건물과 초지가 뒤섞인 에스타크의 풍경이 한낮의 빛을 받아 산뜻한 색채를 발하고 있다. 집은 네모꼴 혹은 마름모꼴로 단순화돼 있고 공장의 굴뚝은 원통형 혹은 기다란 육면체로 묘사돼 있다. 또 초지는 구체적인 묘사는 생략된 채 노란색과 녹색의 단순한 색면으로 환원됐다. 이런 기하학적 단순화와 밝은 색면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그림의 전체적 인상은 세잔이 꿈꾼 고전미술의 견고한 형태감과 빛의 효과를 중시했던 인상주의의 목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서막을 연 입체파와 야수파의 선구가 되고 추상미술의 첫 페이지에 이름을 올린다.

세잔이 세상을 떠난 지 80여년이 흐른 1983년 여름날 한 작곡가가 세잔의 자취를 찾아 엑상프로방스를 찾았다. 프랑스 걀('꿈꾸는 샹송 인형'이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여가수)의 남편인 미셀 베제였다.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은 대가의 숨결을 더듬으며 그는 '세잔은 그리네'를 작곡한다. 프랑스 걀의 우수에 찬 음색을 타고 흐르는 노랫말이 타성에 젖은 우리의 의식을 각성시킨다.

'여기 한 남자가 있네/ 밀짚모자를 쓰고/ 옷에는 물감 자국이 낭자하고/ 수염은 전투를 치르듯 헝클어져 있네.(…)세잔은 그리네.(…)그는 (그림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을 각성시키네.'

정석범 문화 전문기자 / 미술사학 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