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귀족계' 고수익 미끼 포섭…돈세탁 루트로도 악용

뉴스 인사이드 - 경찰팀 리포트

피해 현황·수법
계주들, 돈 많은 '사모님' 포섭…계원 안심시켜 자금 끌어모아

'문어발식' 사기조직
속칭 '돌려막기'로 투자 유혹…계주 혼자 18개 운영하기도

'솜방망이' 처벌 왜
'유사수신행위'와 비슷하지만 친분관계로 조직…규제 어려워
지난 7일 서울 수서경찰서는 계원 15명에게 지급해야 할 25억9000만원을 가로챈 장모씨(53 · 여)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배임 혐의로 구속했다. 장씨는 2008년 6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계원 104명이 참여한 400억원 규모의 일명 '만덕계(契)'를 꾸려나가면서 계원들에게 곗돈을 주지 않고 자신의 다른 계에 넣는 방식으로 25억9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만덕계 사건엔 현직 검사 등 고위 공무원과 연예인 등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노래교실 운영과 함께 화장품 판매업을 하면서 인맥을 넓혀온 장씨는 강남구 신사동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계를 결성했고 곗돈으로 모인 자금 가운데 11억여원을 자신의 보험료와 아파트 관리비,신용카드 대금을 납부하는 데 쓴 것으로 밝혀졌다. 계의 이름은 조선 정조시대 제주도 거상 김만덕(1739~1812)에서 따왔다.

2008년 '다복회 사건'등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강남 귀족계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강남 귀족계 사건은 왜 끊이지 않는지,이들 사건에 사회 고위층 '사모님'과 연예인들이 단골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유는 뭔지 알아봤다. ◆세금 없는 고수익…부동산 투자에도 이용

만덕계 사기 사건 피해자들은 "은행보다 높은 이자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데다 이자소득세를 낼 필요가 없어 쉽게 빠져든다"고 고백했다. 23일 피해자 조모씨(48)와 경찰 등에 따르면 귀족계의 일반적인 이자율은 연 20~30%.연 4~5%인 은행 이자율의 5~7배에 달한다. 조씨는 "강남 부유층 사이에서 계가 유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이들에겐 계가 세무당국의 조사망에 걸려들지 않는 최고의 재테크 수단인 셈"이라고 말했다.

계주와 속칭 '모집책'들은 "여윳돈을 굴려 짧은 시간에 목돈을 만들 수 있다"며 계원을 유혹했다. 실제로 처음에는 월 500만~1000만원의 불입금을 몇 달 만에 서너 배로 불려 나눠줬다. 조씨는 "1년만 계금을 부어도 연봉에 가까운 돈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부유층도 유혹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계모임을 '돈세탁' 통로나 부동산을 투자하는 데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골 피해자는 '고위층 사모님과 연예인'

매번 터지는 대형계 사기사건의 '단골' 피해자는 사회 고위층 사모님과 연예인이다. 2008년 다복회 사건에도 정 · 관계와 법조계,재계 고위층 부인들이 총망라됐다. 연예인들도 빠지지 않았다.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만덕계 사건에서도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과 가수,개그맨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사회 고위층 인사들은 시부모나 아들,친인척 등 차명으로 계에 가입했으며,계모임에는 대리인을 참석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대형 계주들이 포섭 대상 1순위로 사모님을 선호하는 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의 부인들이 계원이니 안심할 수 있다"며 계원들을 설득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계주들이 사모님들에게 접근하는 루트는 고교 동창회나 명문대 경영대학원의 최고경영자과정(AMP).AMP는 500만~1000만원 정도의 등록금만 내면 쉽게 들어갈 수 있고,고위층과 쉽게 친분을 쌓을 수 있다. 탤런트나 개그맨 등 연예인들도 비슷한 이유로 포섭 대상에 오른다. 고소득 자영업자들도 주요 타깃이다. 새 계원을 데리고 오는 일부 계원에게는 1명당 500만원과 명품 시계,의류 등을 주는 일종의 다단계식 모집 방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앞돈 빼 뒷돈 막는 '폰지(돌려막기)'계

이들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들은 "교묘하게 잘 짜여진 사기 조직"이라고 입을 모았다. 귀족계 대부분은 '문어발식'으로 운영된다. 계주 한 사람이 여러 계를 조직하거나 공동계주 · 대리인을 둔다. 만덕계 계주 장씨는 2006년 6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혼자서 18개의 계를 운영했다. 계주들이 복수의 계를 동시에 운영한 이유는 곗돈을 또 다른 계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속칭 '돌려막기'를 하면서 돈을 유용하기 위해서였다. 2008년 11월 구속된 다복회 계주 윤모씨(54 · 여)는 무일푼으로 계를 조직해 곗돈으로 음식점과 인테리어 업체를 차리는 '대범함'까지 보였다. 이들은 낙찰금을 맡기면 불법 사채 시장에 투자해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겠다거나 여러 계에 분산 불입해 돈을 불려주겠다며 계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결국 계원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없고,계 장부만 늘어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귀족계는 높은 이자를 내겠다고 약속한 사람(선순위)이 곗돈을 가장 먼저 타는 낙찰계 방식이다. 이 때문에 선순위 계원이 높은 이자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다른 계원이 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낙찰계는 곗돈을 탈 순번을 계주와 당사자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귀족계는 신분 노출을 꺼리는 부유층 인사들 때문에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데다,계주의 전횡을 견제할 수단이 없어 깨질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우려했다.

◆처벌 수위 낮고,배상받기 어려워

계는 외형적으로 '고수익 보장'을 미끼로 불법적으로 자금을 모으는 '유사수신행위'와 비슷하다. 그러나 계를 유사수신행위로 간주해 처벌하기는 어렵다는 게 법조계의 해석이다. 법무법인 강호의 장진영 변호사는 "계는 계주와 계원들이 주로 친분 관계로 조직하는 일종의 조합 성격을 띤다"며 "이 때문에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 계주는 주로 형법상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뒤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수차례 형사처벌을 받고도 계 이름을 바꿔가며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어낸다. 2009년 7월 곗돈 9억여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던 한마음회 계주 이모씨(56 · 여)는 1년 만에 가석방된 뒤 "다시 계를 들면 곗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며 계원을 끌어모으다가 피해자들로부터 또다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이 곗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계주가 돈을 모두 사용했다면 돈을 돌려받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익상 의정부지방검찰청 차장은 "귀족계는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강력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계의 운영원리…선순위자엔 급전 · 후순위는 목돈 챙겨계의 작동 원리는 은행(계주)이 여윳돈이 있는 사람(후순위로 곗돈을 타는 계원)에게 예금을 받아 돈이 필요한 사람(선순위)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과 같다. 예컨대 계주를 포함한 계원 10명이 매달 10만원씩 10개월을 붓고 월 이자를 10%로 정한 계를 가정해보자.돈이 필요한 사람은 가장 먼저 100만원을 받고,그 다음번 모임에서 후순위에게 줄 이자 1만원을 덧붙여 11만원을 낸다. 두 번째 사람은 101만원을 받고,11만원을 다시 낸다. 이렇게 해서 맨 마지막 사람은 109만원을 받는다. 많은 이자를 내더라도 선순위로 곗돈을 받는 사람은 급전을 마련할 수 있고,후순위 사람은 목돈을 챙기는 것이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