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신용평가社의 '자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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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증권부 기자 kej@hankyung.com"신용등급 상향조정으로 시장의 신뢰도가 더욱 강화될 전망입니다. " SK브로드밴드는 지난주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회사채 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올리자 대대적인 홍보자료를 냈다. 하지만 시장관계자들은 시큰둥했다. "그냥 AA급 기업이 하나 더 늘어난 거죠"라는 반응이었다.
요즘 기업 신용등급이 무더기 상향 조정되는 상황을 보면 이 같은 반응이 이해된다. 우리캐피탈 SK건설 홈플러스 호남석유화학 등 최근 한 달 새 신용등급이 오른 기업만 10여곳이다. 신인도 개선,계열사 시너지 등 조정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AA급 기업 수는 두 배로 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장 참여자들은 신평사가 부여한 신용등급보다 증권사들의 신용의견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신평사 분석엔 무덤덤한 우량기업들도 증권사 신용의견엔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얼마 전 한 증권사가 LG그룹 4개 계열사에 대한 신용의견을 부정적으로 밝힌 보고서를 내자 LG그룹 관계자가 증권사에 전화를 걸어 분석논리와 근거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LG그룹 계열사는 대부분 AA급 이상의 신용등급을 갖고 있지만 이 증권사는 주력 계열사의 부진한 실적과 그룹 전반의 리스크 확대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시장 관계자들은 "신평사 등급과 시장 인식 간 괴리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용평가사 수입의 대부분은 발행사인 기업이 부담하는 평가수수료에서 나온다. 국내 신용평가사는 모두 세 곳이다. 기업은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최소 두 곳에서 평가를 받으면 된다. 결국 보수적이고 깐깐한 한 곳은 기업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기업이 신용등급을 '쇼핑'하고,신용평가사는 신용등급을 '세일즈'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구조다.
신용평가사는 평판으로 먹고산다. 신용등급 왜곡현상이 심화될수록 시장에서 신용평가사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당국은 순환평가제 실시나 평가수수료 제도 개선 등 근본 대책 마련엔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달 중순까지 신용평가사에 대한 대대적인 정기검사가 이뤄졌지만 획기적 개선안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 않다. "이러다간 모든 기업의 신용등급이 AAA에 수렴될 것"이라는 어느 채권운용역의 푸념을 흘려 들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