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베일의 봉쇄구역…평생 묵언 기도

가톨릭 영성의 심장 - (中) 佛 카르투시오 수도회 본원

영화 '위대한 침묵'의 배경…흑사병 치료제로 명성

거대한 암봉을 병풍 삼아 건물을 세웠다. 수십 채의 건물은 서로 연결돼 있지만 또 분리돼 있다. 이런 건물의 독방에 수십 명의 남자들이 평생 자신을 가두고 산다. 제대로 된 음식이라곤 출입문 옆 배식구를 통해 들어오는 점심 한 끼뿐이다. 그나마 육식은 금지요,금요일엔 물과 빵으로 때워야 한다.

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에서 48㎞가량 떨어진 샤르트뢰즈산 속의 수도원.차에서 내려 2㎞쯤 더 올라가자 수도사 복장의 그림과 함께 'Silence Zone(침묵구역)'이라고 적힌 표지가 서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으로 잘 알려진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본원 '그랑드 샤르트뢰즈수도원'이다. 1084년 브루노 성인(1030~1101)이 창설한 카르투시오 수도회는 일반인 출입을 철저하게 제한하는 봉쇄수도회다. 카르투시오회는 봉쇄수도회 중에서도 규칙이 엄하고 생활 조건이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뒤 대부분의 수도회들이 규칙을 완화했지만 카르투시오회는 예외였다. 이들은 100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의 회칙 개정도 없이 고유의 엄률(嚴律)을 그대로 지켜왔다.

높은 담장 너머 수도원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방문객의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된다. 특히 여성은 수녀라도 안 된다. 눈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으니 아쉽기만 했다. 이런 외부인들을 위해 산 아래 2㎞쯤 떨어진 곳에 수도원 박물관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궁금증은 여기서 다 해결해준다.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휴관이지만 멀리 한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을 위해 문을 열고 안내까지 해줬다.

박물관 2층에는 수사들의 거처를 모델하우스처럼 재현해 보여준다. 거처는 2층으로 돼 있는데 1층에는 조그만 정원과 작업실,장작 보관소,화장실이 있고 2층에는 침상과 기도 공간,세면대,책상,식탁,성모상을 모신 성모 경당 등이 있다. 수사들은 매일 오전 5시30분(평수사) 또는 6시30분(사제수사)에 일어나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에 할애한다. 이들은 농사,대장간,인쇄업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자급자족한다. 특히 연간 200만ℓ를 생산하는 '샤르트뢰즈 리큐어'는 흑사병 치료제로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수도원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샤르트뢰즈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침묵이다. 말은 물론 발걸음,문소리 등 모든 소리를 경계한다. 이들은 중병이 아니고선 바깥 병원에 가지 않는다. 죽어서도 수도원 내 묘지에 묻힌다.

이 수도원에 사는 사람은 원장과 20명의 사제 수사,12명의 평수사 등 33명.세계적으로는 26개국에 500명가량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왜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을까. 몇 해 전 만난 상주의 장 폴 수도원장은 "우리의 목적은 어렵고 불편한 삶 자체가 아니라 고독한 삶을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라며 "고독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좋은 환경"이라고 했다. 또한 몸은 수도원 안에 있지만 기도를 통해 세상과 연대를 유지한다고 했다.

수사들의 거처 벽에 붙여 놓은 글귀가 이런 소망과 목표를 말해준다.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지향과 소명은 이 방안에서 침묵과 고독 안에 머무는 것이다. '


◆교황 권고로 한국 진출…상주 · 보은서 27명 수도그랑드 샤르트뢰즈수도원 박물관에서 카르투시오 수도회를 소개하는 동영상에 낯익은 풍경이 나왔다. 경북 상주의 남자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모습과 충북 보은에서 여자수도원을 짓는 모습을 상세하게 담은 장면이 나온 것이다.

카르투시오회의 첫 아시아 진출로 남자수도원은 2000년,여자수도원은 지난해 문을 열었다. 특히 여자수도원은 전 세계에서 일곱 번째여서 한국에 대한 카르투시오회 본원의 관심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카르투시오회가 한국에 진출한 직접적인 계기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였다. 교황은 두 차례의 방한을 계기로 "역사가 짧은 아시아 교회에 유럽 수도원의 영성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고 카르투시오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현재 남자수도원에는 7명,여자수도원에는 20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한국인은 남자 2명,여자 5명으로 알려졌다.

샤르트뢰즈=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