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자발적 가난' 넘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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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좋아졌지만 행복 늘지않아며칠째 맹추위가 이어지자 집 아래쪽에 있는 금광호수의 일부가 얼기 시작했다. 너른 호수는 반짝 추위로는 얼지 않지만, 맹추위가 계속되면 마침내 꽝꽝 얼어붙는다. 호수의 언 부분과 얼지 않아 출렁이는 물의 경계에 가창오리들과 원앙새들이 한 줄로 앉아 있는 것도 한겨울의 볼품 있는 광경이다.
물질적 가난은 욕망의 반영일뿐
절제하면서 마음의 평화 깨닫길"
장석주 시인
큰눈 내린 뒤에는 산에 사는 고라니들 몇 마리가 반드시 먹잇감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온다. 또한 나날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먹이를 구하려는 박새나 곤줄박이의 움직임도 활발해진다.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강추위 속에서도 작은 새들이 생기가 넘친 모습으로 마른 풀숲을 뒤져 씨앗들을 찾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보면 신통하다. 겨울은 모든 생명들에게 궁핍과 시련의 계절이지만 대부분의 생명들은 이 혹한의 계절을 꿋꿋하게 견뎌 이긴다. 그래서 동양의 옛책은 생(生)이야말로 천지의 위대한 덕이고 우주 최고의 도덕이라고 칭송했을 것이다. 겨울은 독거노인이나 조손 가정과 같이 생활 형편이 딱한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시절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평하는 가난은 대개는 상대적 가난이다. 당장 먹을 게 없고 땔 게 없어서가 아니라 내일이 보장되지 않거나 불확실한 데서 오는 가난의 체감이 그것이다. 이때 가난은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비해 덜 가진, 그래서 빈곤하게 여겨지는 상대적 가난이다. 가난의 체감은 진짜 생명의 최소한도의 필요가 결핍되어서가 아니라 더 많이 갖지 못해서 일어나는 착각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흥청망청 낭비할 수 없는 잉여를 갖지 못한 데 따른 불만이 그 불행감의 실체다.
과거에 비해 살림이 더 늘고 사회 전체도 풍요로워졌지만, 이상하게도 행복은 그에 비례해서 늘지 않는다. 절제를 모르는 무분별한 풍요와 사치를 좇으면서 우리 삶은 더 많은 시간을 기쁨이 없는 노동에 종속시키고 불행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추구한 부(富)와 재산 쌓기가 ‘불필요한 필요’의 끝없는 확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자연은 잉여를 허락하지 않고, 낭비를 스스로 정화하는 구조로 진화해왔다. 벌집은 최소한의 밀랍으로 가장 튼튼한 구조를 이루고, 새의 뼈나 깃은 최소한의 무게로 공중을 나는 힘을 지탱한다. 자연에서는 생물학적 생존에 군더더기가 되는 낭비란 죄악이다. 자연을 떠받치는 일체의 낭비가 없는 단순함이 가난이라면, 과식과 탐욕에서 자유스러운 가난이야말로 진정한 부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런 가난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발적 가난이다. 그것은 스스로 많이 갖지 않음으로써 가난에 처하는 것, 즉 ‘꼭 필요한 최소의 것으로, 존재의 단순한 골격만으로 부유함의 모든 욕구를 대체’하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은 세상의 모든 부와 재산을 향한 탐욕과 이기주의를 추문으로 만드는 창조적 가난이고, 성스러운 가난이다. 자발적 가난은 욕구의 절제와 참음에서 비롯되는 평화와 긍지를 주는 유일한 가난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더 많은 재산과 물질을 미친 듯이 뒤쫓는 대신에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찾을 것이다.
더 많이 가질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적게 갖는 게 명확하고 단순한 기쁨과 행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발적 가난을 기꺼움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예수는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했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가난이야말로 내면에서 번져나오는 광채”라고 했을 테다.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