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근 회장 "내레 50년간 원모피 가공했디요…이젠 최고 모피의류 제조가 꿈"

김낙훈의 기업인 탐구 - 윤영근

평양서 태어나 대위로 예편…진도 입사…모피와 인연 맺어
국내 수입 원모피 40~50%…원진에서 가공 처리
직원 상당수 30년이상 베테랑…젊은이들 기피…代 끊길까 걱정
동물보호론자들의 반발도 있지만 여전히 모피의류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겨울 의류 중 하나다. 요즘 여성들은 방한 대신 패션에 초점을 맞춰 반코트의 세련된 제품들을 찾는다.

모피의류를 만들기 위한 작업은 보통 3월이나 4월 초순부터 시작된다. 2월과 3월 중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원모피(Raw skin) 경매에서 낙찰받은 뒤 운반해와야 가공 작업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산의 윤진산업은 국내 최대 원모피 가공업체다. 이 회사도 가공 작업을 시작했다. 모피의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지하창고에는 박스들이 쌓여 있다. 미국 시애틀이나 덴마크 코펜하겐, 핀란드 등의 경매시장에서 낙찰받아 들여온 원모피들이다. 최고급 원피 중 하나로 꼽히는 윤기있는 검정색 계통의 블랙 그라마와 진한 회색의 블루 아이리스도 들어 있다.

이들은 약 50가지 공정을 거쳐 가공 원피(dressed fur skin)로 탄생한다. 불림 세척 산처리 태닝 오일링 톱밥가공 깎기 기름제거 늘리기 빗질 등이다. 이 중 몇 가지는 여러 차례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공정 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바짝 마른 상태로 들여온 원모피를 물에 불려 가공하기 쉽게 만든 뒤 단백질 기름 등을 제거하고 두꺼운 가죽을 깎아낸다. 이어 세척과 건조를 반복해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든다. 필요한 경우 염색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은 원모피가 동물의 피부에서 벗겨낸 것이어서 제대로 손질하지 않으면 냄새가 나거나 썩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꺼운 원피는 딱딱해 옷감으로 적합하지 않고 때로는 벌레가 먹을 수도 있다. 원피 상태에서 그대로 방치하면 상하기 때문에 여름철에도 창고의 온도는 섭씨 영상 10도 이하를 유지한다.이런 공정을 정성껏 처리해야 비로소 대를 물려 입을 수 있는 모피 옷감으로 탄생한다. 가공된 원피는 서울의 윤진모피를 통해 국내 업체들에 팔려나간다. 일부는 안양의 윤진패션을 통해 모피의류로 탄생한다. 모피의류는 이들 가공 원피를 디자인에 따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미싱 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이 회사의 모피의류는 신세계백화점 전국 매장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윤영근 윤진 회장은 올해로 50년째 이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평양 출신으로 평양고보를 나온 그는 1947년 월남해 국학대학을 다니다 중퇴했다. 평양고보는 당시 남쪽의 경기고, 북쪽의 평양고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문고였다. 지금까지 배출한 국무총리만 3명에 이른다.

6·25전쟁 중 군에 입대, 일반 병으로 군무한 뒤 장교로 다시 임관해 모두 10년간 근무했다. 대위로 예편한 뒤 진도에 입사해 모피와 인연을 맺었다. 마침 진도의 창업자가 윤 회장의 장인과 친구인 데다 고향이 비슷해 자연스레 이 회사에 입사한 것이다.그는 “내레 진도에 들어가서 도라무깡(드럼통) 재생부터 시작해 안해본 게 없디요. 스컹크 스크랩을 가공해 수출하기도 했고 나중엔 드레싱 공장장까지 지냈디요.”

지금도 그의 억양에서는 투박한 평양 사투리가 묻어나온다. 윤 회장은 진도에서 드레싱 공장의 공장장을 지내다 부도난 기업을 인수해 1980년에 윤진산업을 시작했다. 그 뒤 30여년 동안은 원피 가공인 드레싱 작업만 해왔다. 주된 소재는 밍크와 여우 라쿤 등 고급 모피다. 2000년부터는 직접 의류 생산에도 나서 모피의류를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

윤 회장은 “우리의 원피 가공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나 캐나다 덴마크 등은 원피 생산이 많지만 가공공장은 별로 없고 이탈리아가 가공 기술이 빼어나지만 우리 역시 이탈리아에 못지 않은 기술력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회사에는 오래 근무한 장기 근속자가 많다. 윤진산업을 맡고 있는 김중근 사장은 진도 출신으로 창업 당시 합류한 멤버다. 이렇게 모피업계 경력이 30년 이상인 사람이 20명에 이르며 이들이 경영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진도 출신이다. 생산된 원모피 가운데 20~25%는 자체적으로 의류를 만드는 데 쓰고 나머지는 국내 의류업체에 판다. 이렇게 이 회사로부터 원모피를 공급받는 모피의류 업체가 약 70곳에 이른다. 윤 회장은 “국내에서 수입하는 원모피의 약 40~50%를 우리 회사에서 가공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즘도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생산현장을 둘러본다. 원피 입고 상황, 세척, 가공 공정을 살펴보고 제대로 가공이 이뤄지는지 점검한다. 윤 회장은 창고나 가공 공정에서 나는 가죽 냄새가 외부인들에겐 거북하겠지만 자신에게는 향기롭다고 했다. 모피 인생 50년에 걸쳐 체득한 것이다. 그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해외에 다니며 경매에 참가해 원피를 사기도 했다. 요즘은 10시간 이상 항공기를 타는 게 힘들어 임직원을 내보낸다.

그의 꿈은 단 한 가지다. 세계 최고라는 이탈리아 모피의류를 뛰어넘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모피 강국으로 도약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원피 가공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윤 회장은 “원피를 제대로 가공해야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다”며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깎기(스카이빙) 공정이고 이곳은 최소한 3년 이상 숙달돼야 제대로 작업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상당수가 이미 60대에 접어들었고 젊은이들이 기피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급 원피 가공 공정은 미국 캐나다 일본과 북유럽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는데 자칫하면 근로자의 대가 끊길 수 있다”며 “젊은이들이 이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근무한다. 그 뒤 자택이 있는 안산시내를 산책하고 헬스클럽에서 운동한다. 건강해야 후진에게 모피 기술을 하나라도 더 전수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윤영근 윤진 회장(83)은 모피산업의 산증인이다. 50년 동안 이 분야에 종사해 왔다. 8년 동안 모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작업복을 입고 공장 구석구석을 누빈다. 윤진산업, 윤진모피, 윤진패션으로 이뤄진 작은 그룹인 윤진의 회장을 맡고 있는 그의 꿈은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최고급 모피의류 업체를 만드는 것이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