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R&D투자 주춤거려선 안 된다

과학기술은 미래희망의 씨앗
어려울때일수록 투자 늘려야
선진국과의 격차 줄일 기회

문길주 <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
내년도 정부 예산 편성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내 산과 바다를 향해 떠날 때, 국가 기획예산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한여름 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내년을 계획하고 예산을 조율한다. 그런데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편성에서 내년도 신규 연구사업을 위한 예산 증액이 거의 없다는 소식이 들려 국책 연구기관을 책임지고 있는 필자의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 없다.

지난 10여년간 국가 연구·개발 예산은 매년 10% 가까이 늘어왔고 최근 기초과학연구원 설립과 기초과학 분야 투자 확대 등 과학기술계가 희망했던 일들이 어느 정도 반영돼 왔음을 알기에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세계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고, 긴축 균형재정으로 연구·개발 예산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좀더 꾸준하고 적극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 기술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혀가야 한다는 조급함 또한 떨칠 수가 없다. 흔히 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자본력과 노동력, 그리고 기술력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가운데 기술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제 선진국의 기술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전 세계를 선도하는 원천기술을 개발해 나가고 있는 중이기에 이 시점에서 기술 혁신을 위한 연구·개발 예산 확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연구·개발 투자는 늘어나야 한다. 이것이 미래의 메가트렌드라 할 수 있는 초고령화 사회에서 국민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국가의 안전과 보건, 환경 등 모든 면에서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대처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2050 클럽’ 가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을 함께 충족시키는 2050 클럽의 가입은 글로벌 경제대국을 향한 첫 관문에 진입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큰 일이다. 먼저 이 클럽에 가입한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 6개국이 모두 예외 없이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어섰다는 것도 고무적이지만 한국의 2050 클럽 가입은 과거 후진국으로 분류됐던 국가 가운데 처음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전쟁 후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의 저력과 중단 없이 이어간 경제발전이 최근 경기 불황 속에서 허덕이는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자리를 함께했던 한 지인은 독일 역시 전쟁 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고 2050 클럽에 가입했지만,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라인강의 기적이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재건’이었던 것과 비교해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실질적인 기적은 근대사에서 한국이 유일하다는 설명이었다.우리가 전 세계 근대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계의 노력이 그 비결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 요사이 국내 청소년들 사이에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나타나고 유학을 떠난 신진 과학자들이 귀국을 기피한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랜만에 과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야기였다.

과학기술은 미래를 키우는 희망의 씨앗이다. 한 해의 농사도 씨를 제대로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분초를 다투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1년이란 시간은 특정 과학 분야에서 주도권을 빼앗고 빼앗길 수도 있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부디 연구·개발 예산 및 정책 담당자들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조정과 결정을 이끌내고, 오는 가을 국회가 보다 현명한 판단으로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의 내일을 중단 없이 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우리가 ‘2050 국가’에서 ‘3050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최우선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문길주 <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kcmoon@kist.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