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에 묻은 흐릿한 '쪽 지문' 에도 범인은 숨어있다

[경찰팀 리포트] 美 FBI도 놀라게 한 한국 지문채취 기술

겹쳐지고 일부만 남아도 식별…미궁에 빠졌던 사건 풀어내
태국 쓰나미 희생자 확인땐 물에 퉁퉁 불은 시체 손가락 고온처리 기법으로 감식
미국 FBI와도 공동 실습…전문인력 양성 등 과제 남아

2004년 12월5일 오전 3시께 대전 동구 대성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민 문모씨(당시 42·여)가 흉기에 10여차례 찔린 채 발견됐다. ‘대성동 40대 부녀자 살인사건’이었다. 경찰이 강력반 5개팀 37명으로 전담팀을 편성해 동일수법 전과자 등 용의자 1500여명을 수사했지만 사건은 7년 이상 미궁에 빠졌다.

‘콜드 케이스(장기 미제사건)’로 분류되던 이 사건의 실마리는 다름아닌 ‘지문’이었다. 범인 김모씨(53)는 당시 문씨를 찌른 칼집을 감았던 청테이프 안쪽 접착면에 남아 있던 ‘쪽 지문(지문의 일부)’ 때문에 지난 1월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흐릿하게나마 채취했던 지문을 대전지방경찰청 장기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이 강도전과자 79명의 지문과 대조해 김씨를 검거한 것. 현대 과학수사의 첫걸음이자 필수 기법으로 자리잡은 지문감식이 올린 개가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조선총독부 법무국 행형과에서 국내 최초로 강갑득의 지문을 채취한 지 100여년, 우리 수사당국의 지문감식 기법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이제는 영미권 등 선진국의 기술을 일방적으로 습득하는 게 아니라 미국의 연방수사국(FBI) 등 외국 수사요원들이 한국을 직접 방문해 기술 교류의 장을 열고 상호 한수 배우는 수준에 이르렀다.
유제설 순천향대 법과학대학원 교수는 “지문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법과학 증거”라며 “각국 지문채취 기법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국내 기술도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고 평가했다.

◆미 FBI와 ‘지문채취’ 비법 교류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서울 안암5동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5층 해부학실습센터는 연일 한·미 과학수사요원들로 북적였다. 사체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시험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양국 과학수사요원들이 머리를 맞댄 것. 현장에서 매일 마주하는 부패한 시신이 아니라 오로지 ‘실습’을 위해 지문을 채취할 수 있는 드문 기회라 전국 지방경찰청 소속은 물론 국방부·대학 등지의 유관기관 과학수사요원까지 48명이 참여했다. 한·미 과학수사요원 간 공동실습은 이번이 처음이다.경찰청과 FBI한국지부의 협의 아래 미국 측에선 FBI범죄수사정보서비스(CJIS·Criminal Justice Information Service) 소속 연구원 5명이 동참했다. 이들은 냉장처리된 사체를 둘러싸고 손가락 끝에 지문채취용 검정색 파우더(분말)를 바르거나 실리콘을 바른 뒤 조심스럽게 떼어내기도 하면서 정확한 지문채취에 여념이 없었다. 전문가들의 섬세하고 능숙한 손 놀림에 지켜보던 기자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살이 폭 패인 사체의 손가락에서는 주사기로 특수약물을 주입해 부풀린 뒤 지문을 얻어냈다. 분말·시약·접착체를 이용하는 기본 채취 기법은 양국 요원들 모두 숙지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은 저마다 달랐다. 한국 과학수사요원들은 FBI 연구원들이 고무찰흙 위에 사체의 지문을 찍어내자 “(지문의) 융선이 깨끗하게 살아났다”며 감탄했다. 이들은 질세라 검정색 파우더를 바른 뒤 투명테이프로 지문을 ‘뜨는’ 다기능접착식 지문테이프를 선보였다. 윤광상 경기경찰청 일산경찰서 과학수사팀 경위가 자체 개발해 특허까지 낸 제품이다. 분말을 바른 손에 접착식테이프를 붙인 뒤 투명한 판에 다시 붙여 지문의 선명도를 높였다. FBI 연구원들은 접착테이프 기법을 신기해하면서 테이프를 두 상자씩 얻어갔다는 후문이다.

손가락에서 지문은 수월하게 얻어냈지만 목·어깨·다리 등 손가락 외 숨진 이의 몸에 묻은 지문을 채취하는 데 양국 요원들은 진땀을 뺐다. 온도와 습도가 관건인데, 당시 실험에 사용된 사체의 습도가 지나치게 높아 명확한 지문을 얻어내기 어려웠던 탓이다. 사체 피부에 눌렀다가 떼어낸 종이에 검정 파우더를 칠해 지문을 채취하려 했지만 좀처럼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딱 떨어지는 지문이 쉽게 나오지 않는 바람에 지켜보던 참석자들도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실습에 참여한 한 FBI CJIS 연구원은 “한국 경찰의 지문채취 기법이 상당한 수준이란 걸 실감한 자리였다”며 “일방적으로 뭔가를 가르치러 온 게 아니라 우리가 쓰는 방법을 보여주고 한국 경찰의 방식도 배워가는 교류의 장이었다”고 흡족해했다.

◆쓰나미현장 누빈 기술…방글라데시·부탄에 전수

미국 수사당국과의 기술 교류는 2004년 12월 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지진해일)가 계기가 됐다. 사체 6000여구의 신원을 확인하려 39개국이 ‘태국쓰나미희생자 신원확인팀’을 꾸려 작업했다. 당시 한국팀이 자체 개발한 ‘고온처리법’은 사고 현장에 파견돼 온 FBI 소속 전문가들은 물론 이탈리아·스페인 등 각국 과학수사요원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물에 퉁퉁 불은 사체의 손가락을 헤어드라이어로 말리는 기존 방법 대신 70~80도의 물에 몇 초간 담궜다 꺼내기를 반복하면서 손가락 피부를 편 뒤 지문을 채취하는 새로운 기법이었다.

고온처리법을 개발한 윤광상 경위는 “입구가 넓은 커피포트에 시신의 손가락을 넣었다 빼는 방법을 알려줬더니 다음날 미국팀은 물론 각국 팀이 현장에 커피포트를 쫙 깔아뒀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한국팀은 투입 5개월 만인 2005년 5월 39개국 가운데 가장 먼저 시체 18구의 신원을 모두 확인했다.

FBI도 한수 배울 정도가 된 한국 경찰의 지문감식 기술은 ‘수사 한류’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초청으로 매년 각국에서 오는 수사요원들은 국내 과학수사요원들의 강의를 듣고 비법을 전수받아 간다. 경찰청 관계자는 “주로 부탄, 피지, 케냐 등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경찰들이 기법을 배워간다”며 “방글라데시의 경우 우리에게 기술을 배워 간 것은 물론 KOICA의 후원으로 자국에 과학수사 인프라까지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독학파 감식전문가…전문인력 양성 급선무

국내 지문감식 기술 수준은 높은 편이지만 전문인력 양성시스템은 아직도 부실하다. 현재 전국에 있는 과학수사요원 1020명은 검시관을 제외하면 모두 경찰이 된 뒤 자의반 타의반 과학수사팀에 배치된 인력이다. 강력사건 현장에서 과학수사의 필요성을 절감해 투신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실력 차이가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영미권처럼 의학·과학 전문인력을 ‘전문직’으로 특별채용한 뒤 경찰 기본업무 재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순천향대 법과학대학원을 필두로 경북·충남대에서도 유사한 석사과정을 운영 중이지만 아직 이들을 특채해 경찰 인력으로 흡수하는 등의 제도적 방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10년 넘게 이 분야에 매진해온 최용석 경찰청 과학수사계장은 “학부나 대학원 차원의 인재도 흡수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방안은 경찰 채용 단계에서부터 과학수사요원이란 별도 ‘직군’을 신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선주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