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저기 가을이 오네

"땅에선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 뭉개구름 타고 온 가을
가끔 들판에 나가보는 여유를"

이순원 < 소설가 >
아직 8월이니 여름이 다 끝난 건 아니다. 이번 여름 참 무더웠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도 없었다고 말한다. 여름 가뭄이 참 길었다. 늘 맑게 흐르던 강까지 녹조 현상을 보였다. 가을까지 내내 무더울 기세였다.

그러나 절기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엊그제 모기의 입이 삐뚤어지고, 하루에 한 뼘씩 무성하게 자라던 풀도 이제 울며 돌아선다는 처서가 지났다. 말 그대로 여름이 그친다는 뜻이다. 어느 절기든 그 절기의 징후는 땅에서도 오고 하늘에서도 온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 초복 중복 말복은 순서는 그렇게 정해 있어도 어느 때가 더 덥고 어느 때가 덜 덥고가 없다. 삼복 중에 드는 절기인 소서 대서 역시 날씨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그 무렵 어느 때 비가 내리면 소서가 더 덥기도 하고 대서가 덜 덥기도 하다. 그건 겨울 절기인 소한과 대한 역시 말은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고는 하지만 보름 사이의 어느 때가 더 춥고 덜 춥고가 없다.

그러나 여름이 그치는 처서는 어느 경우에도 그 앞 절기 입추보다 확실히 덜 덥다. 입추가 되어도 쉽게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처서를 지나면 제풀에 지쳐 서늘한 기운을 불러들인다. 밤에 문을 열어놓고 자던 집들도 베란다의 한쪽 문을 슬그머니 닫는다. 며칠 사이에도 그만큼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진다는 뜻일 것이다. 정말 간사한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아침저녁 기온의 차이인지, 바람 몇 점에 금방 변해버리는 사람의 마음인지 모를 정도다.

어쨌거나 밖에 나가면 똑같은 풍경인데도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이다. 그것이 바로 아직은 어제나 다름없는 초록빛 들판에서 느끼는 가을의 첫기운이다. 어제는 모처럼 동네 공원을 벗어나 조금 멀리 시골 동네로 산책을 나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시멘트 길이 아닌 야트막한 언덕길을 걷다가 어느 감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감들은 아직 초록빛 그대로인데 유독 일찍 익는 감인지 벌써 누런 기운이 돌아 반가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전화기로 그 모습을 담아 몇몇 친구들에게 보내주었다.이제 보름만 지나면 햇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아직은 푸른빛이지만 들판의 벼들이 달게 익으려면 이제부터 보름쯤 가을볕이 좋아야 할 것이다. 정작 어릴 때는 어른들이 하는 곡식 걱정 얘기를 들어 그런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자랐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쩌다 하루 이렇게 들판에 나와서도 풍경만 눈에 들어오지 그 풍경 속의 곡식과 과일 사정은 아예 남의 일처럼 잊고 있다.

무더운 여름 끝에 이제 막 시작하는 가을과 깊어가는 가을의 구분도 어린 시절엔 들판의 곡식과 나무로 판단했다. 그 시절 우리는 여름의 문턱을 넘어 막 시작하는 가을을 아침저녁 우리의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바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산에 가득한 개암을 깨물었을 때 도깨비를 쫓아내듯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신맛 대신 달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돌면 그것이 곧 가을의 시작임을 알았다.

모두들 해마다 여름이 길어지고 가을이 짧아진다고 말해도 처서 지나면 개암이 익고 밤이 익는다. 유난스레 이번 여름은 무덥고 후텁지근했다. 이제 보름쯤 들판의 벼를 익힐 햇볕이 여름 폭양과는 다르게 농부들한테 귀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맨땅 위에 떨어지는 볕도 여름볕과 가을볕은 모양이 다르다. 여름볕은 피하고 싶지만 가을볕은 저도 모르게 저절로 손을 내밀게 된다. 그런 가을이 벌써 뭉게구름과 귀뚜라미 등을 타고 왔다.

도시의 생활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가끔씩 들에 나가보자. 거기가 꼭 내 논밭이 아니어도 가을 들판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이제부터 익기 시작하는 오곡백과가 들에서도 익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들 마음 속에서도 익는다. 세상살이가 온통 힘들고 어지럽다 해도 들판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는 마음처럼 이 가을 우리 모두 조금씩은 여유롭고 너그러웠으면 좋겠다.

이순원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