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도 재산이라고?…저소득층 두번 울리는 '그들만의 계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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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8주년 한경 특별기획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소형 연립주택에 살고 있는 이인영 씨. 남편과 사별한 뒤 보험모집인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올해부터 연 최대 200만원까지 주어지는 근로장려세제(EITC)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년까지 근로자에게만 적용됐던 EITC가 보험모집인, 방문판매원 등 일부 자영업자들로도 확대 적용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세무서는 이씨의 근로장려금 신청을 거절했다. 남편이 생전에 구매해 이씨가 보유하고 있는 주택 때문이었다.
누더기 복지기준 '국민만 괴롭다' (4) 서민 외면하는 부채 계산법
정부 "인력 부족해서…"
자산 평가때 부채 감안 안해 근로장려금 탈락자 속출…노령연금 등과 형평성 어긋나
부채 성격따라 차별화
은행·공제조합 빚만 인정, 카드빚 금융소득에 넣기도…전문가 "부채 기준 재정비를"
◆억울한 탈락자 속출이씨가 거주하고 있는 주택의 기준시가는 8000만원. EITC 적용 대상인 기준시가 6000만원 이하 주택 기준에 걸렸다. 2008년식 모닝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는 그는 총 재산의 합이 1억500만원에 달해 총 ‘재산 1억원 미만’이라는 기준에도 벗어났다.
이씨가 억울한 것은 주택 가격 중 3000만원이 주택담보대출이기 때문. 빚을 제외한 집의 순자산 가치는 5000만원에 불과하다. 이마저 매달 돌아오는 이자를 갚기도 벅차 매물로 내놨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수년째 매매가 안되고 있다.
대부분의 복지제도가 재산을 평가할 때 부채를 감안해주지만 EITC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씨는 3000만원의 담보대출 외에 500만원의 개인빚도 지고 있지만 이것 역시 재산 평가에는 전혀 반영이 안됐다. 결과적으로 빚도 재산으로 간주한 셈이다. 결국 이씨는 순자산 기준 7000만원을 갖고도 EITC 대상에서 탈락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자격이 안된 신청자들도 있었겠지만 올해 EITC를 신청했다가 탈락한 30여만가구 가운데 상당수가 이씨 같은 경우라는 게 주무청인 국세청의 얘기다. 실제 재산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탈락하는 신청자 비중은 지난해 43.5%에 달했다.
◆정부 “행정력 한계로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부채를 감안한 순자산으로 대상자를 가리지 않는 것일까. 지난 8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국정감사 발언이다. 박 장관은 “현행 요건을 완화해줄 필요가 없느냐”는 이만우 새누리당 의원의 질의에 “요건 완화시 재정부담도 크지만 현실적으로 부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고 답변했다. 국세청의 제한된 행정력으로 연간 신청자 100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일일이 부채규모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국세청 관계자도 “부채를 감안하는 게 당연히 맞고 합리적이지만 지금 인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그런데 특별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EITC만 그런 게 아니다. 국가장학금제도, 갑작스런 배우자 사망 등으로 생계유지가 곤란한 이들에게 제공하는 긴급복지지원도 재산평가시 부채를 평가 항목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국가장학금 제도의 경우 건강보험공단의 소득자료를 토대로 대상자를 가려 뽑기 때문에 부채정보가 빠지게 된 케이스다. EITC와 이유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긴급복지지원제도는 최저생계비 150% 이하의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긴급 부조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부채 유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정부 측 설명이다.
◆빚을 소득으로 간주하기도이 같은 상황에서 제도 간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는 기초노령연금과 보육료 지원, 기초생활보장제도 등은 재산평가시 부채를 감안한 순자산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제도가 EITC와 달리 행정력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이유는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통합전산망을 이용하고 있어서다. 이 정보망에는 금융기관 거래정보가 담겨 있다. 굳이 현장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손쉽게 부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부채를 인정해주는 이들 제도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어디서 빌린 돈이냐에 따라 부채를 차별화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은행, 공제조합 등으로부터의 빚만 인정할 뿐 카드빚이나, 사채, 개인 간의 사적인 채무 등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카드빚이나 사채 등의 경우 부채가 아니라 소득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친인척에게 빌려서 계좌에 넣어둔 돈을 부채가 아니라 금융소득으로 간주한다는 것. 정부가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는 계좌에 입금된 돈이 소득인지 빚인지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점에서다. 친인척들로부터 공짜로 얻은 돈을 빚으로 둔갑시키는 경우를 차단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소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쓴 사람들이 기초생활보장 대상 등에서 탈락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신용도가 낮은 취약계층의 경우 금융기관과의 거래 대신 사적 거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데, 정부가 이를 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국민권익위원회 사이트 등에는 ‘생활고에 시달려 카드빚을 졌는데 이걸 금융소득으로 잡아 복지제도에서 제외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홍성대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 연구위원은 “복지사업별로 소득이나 재산 평가의 기준과 항목이 상이한 것은 마치 어떤 물건의 길이를 잴 때 시간과 장소, 재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복지정책의 공정성이 무너져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 근로장려세제(EITC)
Earned Income Tax Credit. 저소득 근로자 가구의 근로 의욕을 높이기 위해 근로소득에 따라 산정된 장려금을 지급하는 제도. 매년 종합소득세 신고기간(5월1~31일)에 주소지 관할 세무서에 신청하면 3개월 내에 지급 여부가 결정된다. 전년도 부부합산 총소득이 일정금액(1300만~2500만원) 미만이면서 주택(기준시가 6000만원 미만)을 포함한 재산 합계액이 1억원 미만이어야 받을 수 있다.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
특별취재팀 김용준 경제부 차장(팀장), 주용석 경제부 차장, 김유미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