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에 부드러운 예술을 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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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조각' 대표작가 최우람 씨 개인전아버지는 어느 날 일곱살 난 아들에게 커다란 캔버스를 주며 그리고 싶은 것을 맘껏 그려보라고 했다. 아들은 거대한 고래를 그린 뒤 ‘로봇 고래’라고 제목을 붙였다. 고래 모양을 드로잉한 후 눈 부분에 로봇 조종실을 만들었고, 위장 기관은 파이프로 이어붙였다. 미술에 테크놀로지를 접목했던 어린이는 자라서 기계 생명체를 조형화하는 사람이 됐다. 내달 1일부터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10년 만에 개인전을 갖는 설치 미술가 최우람 씨(42)다.
최씨는 “어릴 적부터 기계에 강한 애착을 가졌다”며 “문명의 산물인 기계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복제, 번식하고 진화해 나가는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작업 모티브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최씨는 스스로를 ‘준과학자로서의 예술가’로 규정하고 정태적인 조각보다는 벌레나 곤충, ‘전기 담쟁이’ ‘다이오드 민들레’를 소재로 운동성이 있는 기계 형태의 조형 예술에 몰두해왔다. 최근에는 ‘움직이는 조각’이라는 형식은 유지하되, 개별 생명체의 모습이 아니라 소리와 이미지, 텍스트, 영상을 통합해 신화 속의 존재를 형상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2006년 국내 작가로는 처음 도쿄 모리미술관에 초대된 최씨는 영국 리버풀비엔날레(2009), 미국 레시빌 프레스토뮤지움·뉴욕 비트폼갤러리(2010), 뉴욕 아시아소사이어티 뮤지움(2011)에 참가해 국제 미술계의 유망주로 부상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자동차’를 개발한 할아버지, 미술을 공부한 부모 덕분에 자연스럽게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됐다”며 “지난 10년간 해왔던 기계문명에 대한 논의를 신화와 종교의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며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중앙대 조소과) 세상의 기계들이 생명체화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인간이 기계에 종속돼가는 현대사회가 무서웠고요. 한때 로봇회사에 취직해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관심을 더 키웠죠. 직장을 그만두고 연희동에 작업실을 차린 후에는 청계천을 수천 번 들락거리며 공구상 주인들에게 부품 사용법을 묻고 또 물어가며 작품을 만들었죠.” 최씨는 요즘 자연 다큐멘터리 방송과 생태학 관련 서적을 들여다본다. 거기서 얻은 힌트에다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구상한다.
전시장에는 금빛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스틸 등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작품들이 빛을 내며 서서히 움직인다. 모터와 컴퓨터로 움직이는 생명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최근작 4m 크기의 ‘허수아비’는 수십만 개의 전선을 이용해 ‘네트워크의 신’을 형상화했다. 그는 “사람이 아닌데 사람의 형상으로 새들을 미혹하는 허수아비처럼, 현대인들도 실체가 없는 네트워크 세계를 숭상하고 종교화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조금씩 먹어가는 모습을 조형화한 작품 ‘우로보로스(Ouroboros)’는 탄생과 죽음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조형화했다. 작가는 “자신의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은 처음과 마지막이 이어진 원이 돼 무한하게 회전을 되풀이하는 원형이라는 점에서 윤회 사상의 의미와도 상통한다”고 설명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파빌리온’은 신화 속 모습을 표현했다. 작품을 수호하는 듯한 천사들이 파빌리온 꼭대기를 에워싸고 있고, 천장에는 빛을 반사시키는 아름다운 미러볼이 매달려 있다. 최씨는 “인간이 신성시하고 경배해온 것들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면서 맹목적 믿음에 대한 경고”라고 했다.
바다사자와 같은 형상의 ‘쿠스토스 카붐’, 부드러운 순풍에 빛을 내며 날개를 흔드는 금속 생명체 등의 작품은 자연사 박물관 같은 공간을 연출한다. 움직이는 조각 8점과 드로잉 작업 50여점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회는 내달 30일까지 열린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