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명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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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 숨쉬는 80년 역사…문화메카의 화려한 부활 꿈꿔지난달 출판된 유민영 교수의 산문집에 실린 명동과 관련한 글을 읽으며, 새삼 세월의 무심함을 실감한다. 나와 명동의 인연은 고등학생 시절 국립극장 연극을 보러 다니던 열혈관객으로 시작됐다. 대입시험을 앞둔 1월 겨울철단막극 시리즈를 통해 정일성 오태석을 만났고, 장민호 백성희 나옥주 이낙훈의 명연기에 흠뻑 취했던 것도 이 즈음이다. 당시 중앙대 신입생 김을동의 원숭이재판을 본 것도 명동국립극장이다.
구자흥 < 명동예술극장장 koo.jahung@gmail.com >
당시에도 명동의 중심은 지금처럼 명동성당과 명동예술극장이었다. 명동예술극장은 1934년 일본인 이시바시 로스케가 영화관으로 지은 명치좌로 출발한다. 주로 일본 영화가 상영됐던 최고의 영화관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창극, 클래식과 대중가요,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가 공연됐다. 극장다운 극장이 별로 없던 시기였기에 이 극장은 한국 최초의 기록을 여럿 보유하고 있다. 김자경과 마금희가 주연한 춘희(라트라비아타)는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오페라였고 최무룡의 햄릿, 여성국극 옥중화 등이 모두 한국 최초의 셰익스피어, 창극이었다. 해방 후 최초의 한국 영화 자유만세가 상영되고, 현인이 취입 전 ‘신라의 달밤’을 처음 선보인 곳도 이 무대다. 그러나 본격적인 명동시대의 개막은 전쟁이 끝난 뒤 1957년 국립극장의 명동 귀환과 함께 시작된다. 이후 명동은 김수영 천상병 조지훈 이봉구 등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성악가, 화가, 연극인들의 만남의 아지트이자 창작활동의 보금자리가 된다. 이해랑이 살던 집을 팔아 개업한 다방 동방살롱은 예술인들이 하루종일 진을 치고 인생과 예술을 논하고 원고를 쓰느라 정작 일반 손님들이 앉을 자리가 없었고, 예술인들의 커피 외상거래에 결국 동방살롱은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그러나 이후에 생긴 희랍다방, 코지코너 그리고 술집으로는 대부집과 은성이 예술가들의 놀이터로 꾸준히 사랑을 받았다.
명동이 한국공연예술의 메카로 우뚝 서게 된 것은 극장을 함께 쓰던 시공관이 광화문으로 옮기고 난 1962년부터이다. 1170석의 객석을 820석으로 줄이는 등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극장을 단독으로 쓰게 된 중앙국립극장이 산하단체로 극단, 오페라단, 무용단, 국극단을 새롭게 구성했다. 거기에 실험, 민중, 산하, 가교 등 동인제극단의 역동적인 활동으로 한국 공연예술은 활기가 넘치고, 바야흐로 명동 전성기를 구가한다. 여기에 카페 떼아뜨르, 삼일로창고극장, 엘칸토극장 등 소극장에서의 창작극, 전위극, 판소리 등 다양한 공연들이 힘을 보탰다.
그러나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하고 극장을 민간에 매각함으로써 짧은 명동 르네상스의 막이 내린다. 그리고 2009년 명동예술극장이 재출범하면서 쇼핑과 관광의 메카에서 문화 중심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약하고 있다. 이 극장에서 1970년 극단 실험극장의 허생전 공연 때 창구 티켓 판매로 시작한 내 연극인생의 마감을 앞두고 선배들의 치열했던 명동 예술혼 부활을 다짐해본다.
구자흥 < 명동예술극장장 koo.jahung@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