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기계가 스마트해질 수록 우리는 점점 바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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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디지털 치매, 단순 건망증 넘어 사고와 비판능력 저하 초래영국 런던에서 택시기사 면허증을 받으려면 약 2만5000개에 이르는 도로와 수천 개의 광장, 주요 지점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익히는 데에는 보통 3~4년이 걸리며, 여러 번의 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
뇌세포 90% 파괴돼서야 정신적 추락 실감해
디지털 치매
만프레드 슈피처 지음 / 김세나 옮김 / 북로드 / 416쪽 / 1만8000원
런던의 뇌 과학자들이 면허증이 있는 택시기사 18명과 버스기사 17명을 조사했다. 이들은 연령이나 학력, 운전경험, 지능 면에서는 차이가 없었지만 ‘해마’라는 뇌의 특정 부위의 양에선 차이가 확연했다. 택시기사들의 해마 양이 훨씬 많았던 것. 해마에는 특정 장소를 담당하는 세포들이 있는데 택시기사들이 런던 시내 도로와 광장 등을 학습하는 동안 이들의 해마는 늘어난 반면 버스기사들은 정해진 노선만 운행하는 탓에 해마가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운전하는 대다수 사람의 해마 상태는 굳이 사진 찍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 치매》의 저자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현상을 새삼 들춰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경고한다. 독일 울름의 대학정신병원장 및 신경학센터 소장인 그는 “신경생물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의 뇌는 인지하기, 생각하기, 체험하기, 느끼기, 행동하기 등 사용하는 데 따라 변화한다”며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하는 시간 역시 뇌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라고 설명한다. 그 결과 오랜 진화의 산물인 뇌에 디지털 미디어가 그간의 진화 방향과는 다른 흔적을 남기면서 인간의 정신적 프로세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사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다. 저자의 말대로 친척이나 친구, 지인들의 전화번호는 휴대폰에 저장돼 있다. 이들과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이 알려준다. 공적, 사적 일정도 휴대폰이나 PDA가 알고 있다. 모르는 건 인터넷에 물어보면 된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하고 저장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학생들은 숙제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조사하는 대신 네트워크를 통해 누군가에게 그냥 물어보기만 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운전자는 내비게이션으로 위치를 추적하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추적당할 뿐이다. 인터넷의 지식검색은 다 익은 과일만 보여줄 뿐 과일이 어떻게 맺히고 커서 익어왔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지식의 본질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의문을 제기하면서 파고들고, 퍼즐의 작은 조각들을 의미 있는 하나로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디지털 기기에 맡겨놓고 살다 보니 사람의 뇌에서 이런 기능들이 점점 저하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저자는 “2007년 한국의 과학자들이 처음 발표한 디지털 치매는 단순히 갈수록 더 자주 잊어버리는 것 이상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디지털 치매는 망각, 건망증을 넘어 정신적인 능력, 사고와 비판능력에 관한 것이며 정보의 홍수라는 미로에 관한 것이다. 저자가 디지털 치매를 ‘정신적 추락’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문제는 뇌의 경우 신경세포의 90%가 파괴되고 나서 어느 순간 기능을 아예 멈춰야 추락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 학습하지 않는 뇌는 장기간에 걸친 추락현상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는 얘기다.
저자는 수많은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디지털 미디어의 제한적인 사용을 주장한다. 전자교과서, 디지털 교재 등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컴퓨터에서 베껴쓰기는 학생들의 정신활동을 감소시키므로 학습에 부정적인 효과를 준다. 동시에 다수의 미디어를 이용하는 멀티태스킹은 집중력 장애를 초래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로이 피 교수팀이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8~12세 소녀 346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온라인친구들이 자신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는 아이들은 10%에 불과했다. “디지털 미디어는 문화의 일부이므로 이와 싸운다거나 없애자는 게 아니다”라면서 저자가 경고하는 중독성의 결과는 끔찍하다. 뇌의 활동량이 줄면서 신경세포가 파괴되고 그 결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퇴보시켜 정신적·신체적 몰락, 사회적 퇴보와 고립, 스트레스, 우울증의 악순환이 시작될 것이라는 얘기다. 학생들의 12%가 중독증상을 보이는 한국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미디어 교육을 장려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소개하는 디지털 치매 예방법은 모두 아날로그적이다. 가장 효과적인 두뇌 조깅은 그냥 조깅이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일을 줄이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웃어라, 적극적으로 장애물을 극복하라, 삶을 단순화하라, 친구 세 명과 하는 저녁은 페이스북에서 300명과 하는 가상접촉보다 우리를 훨씬 행복하게 한다, 어린이의 디지털 미디어 사용 시간을 제한하라.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