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위기 3년] 긴축 반발로 꺾인 '정치 리더십'…복지 감축은 손도 못대

(2) 갈팡질팡 정치에 발목 잡힌 재정개혁

여전히 과도한 복지
생애소득 대비 연금비중…위기국, EU평균보다 높아

정치에 발목잡힌 위기해법
정책 이끌 정당 '위태위태'…적자감축 약속도 무위로
로마 북동쪽의 고도(古都) 라퀼라시의 마시모 치아렌테 시장은 최근 파격적인 방침을 발표했다. 시청사 앞의 이탈리아 국기를 내리고 중앙정부 파견관도 돌려보내겠다는 것이다. 지난 2월부터 기능이 사실상 멈춘 중앙정부에 대한 항의 표시다. 라퀼라는 유럽 재정위기 발생 1년 전인 2009년 4월 지진으로 309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재정위기가 겹쳐 2만2000명이 아직도 임시 숙소에서 지내고 있지만 정치권은 제대로 된 재건 계획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재정위기 3년을 맞는 유럽의 리더십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위기 해법을 둘러싸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 남유럽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 간의 갈등이 문제였지만 올 들어서는 유럽연합(EU) 차원에 머물렀던 리더십 공백 문제가 각국 정부로 전이되면서 위기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아직도 복지 감축 갈 길 멀어

재정위기를 맞은 국가들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몇 차례 손을 댔음에도 그리스인이 은퇴한 뒤 받을 수 있는 연금은 2011년 말 현재 생애 평균 소득의 95.7%에 이른다. 스페인은 81.2%, 이탈리아는 64.2%로 EU 평균(63.1%)보다 높다. 경제 우등생인 독일은 이 비율이 42.0%에 불과하다.

재정위기설이 나도는 프랑스와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위기에 빠진 4개국 재정에서 연금 관련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12.2%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EU 평균은 9.3%다.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2050년 16.3%까지 늘어 이들 국가의 재정을 압박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독일과 위기에 빠진 스페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지출 비중은 26.3%로 같았다. 똑같은 정부 돈을 쓰더라도 스페인이 비생산적인 분야에 돈을 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연금 등 복지 지출 삭감 속도가 재정위기에 따른 경제 규모 위축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할 만큼 했다고 하지만 복지 분야가 경제 규모에 비교해 비대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길 잃은 정치 리더십

그럼에도 정부 지출 삭감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위기국 정부들은 어느 때보다 허둥대고 있다. 이탈리아는 2월 총선 이후 새로운 정부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긴축 재정에 반대하는 제3 정치세력인 ‘오성운동’이 23%의 득표율로 약진하면서 제1당인 민주당과 2당인 자유국민당 등 양대 정당이 국정을 주도할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마리오 몬티 총리가 자리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정책을 수행할 수 없는 ‘식물 정부’ 상태다. 올해 재정적자를 GDP의 3% 수준으로 조정하겠다는 EU와의 약속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사회당 정부는 전임 사르코지 정부의 긴축안을 뒤집고 일부 정부 지출을 늘리고 있다. 2012년 5월 임기를 시작한 이래 일부 직종의 연금 수령 연령을 낮춰 연금 부담을 가중시켰으며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올해부터는 6~18세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 대한 교육수당도 70유로(약 10만원) 인상했다. 긴축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포르투갈에서는 정부의 긴축정책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내려졌다. 작년 9월에도 사회보험료 인상을 통한 재정적자 감축안이 시민단체들의 반발로 좌초한 바 있다. 포르투갈이 780억유로의 구제금융 지원을 EU와 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받으려면 올해 13억유로의 예산적자를 줄여야 한다.

◆정치 혼돈 … 위기 대책 무력화 개별 국가의 정치 문제가 유럽 위기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로 등장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재정 긴축과 구제금융 신청, ECB의 무제한 단기 국채 매입으로 이어지는 위기 해결 솔루션이 첫 번째 단계부터 무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페퍼 컬페퍼 유럽대 정치학과 교수는 “위기국들의 정치가 경직된 가운데 각 정당도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르지오 스퀸지 이탈리아공업총연합 회장도 “정치적 공백이 이탈리아 GDP를 1% 이상 깎아 먹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급기야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22일(현지시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적자 감축이 필요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며 “각국 정부가 정치·사회적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