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부부채 50조 달러] 돈 풀기 경쟁에 빚만 늘어…美·日 이어 英·佛 부채도 GDP 육박

정부 부채 탈출구가 없다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부채 비율 급증
미국 4년만에 30%P·일본은 46%P 늘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5월 유럽을 방문해 현지 금융계 인사들과 대화하다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아데어 터너 당시 영국 금융감독청장이 “영국의 정부 부채가 너무 많아 중앙은행이 자국 국채를 소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부채 수준이 심각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국채 상환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속내를 드러낸 셈이다. 이 부회장은 귀국 즉시 “부채 문제가 경영에 미칠 수 있는 파장을 조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50조달러를 넘어선 세계 정부 부채는 세계인이 1년간 번 돈을 거의 다 쏟아부어야 갚을 수 있는 규모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총생산(GWP) 대비 최대 규모이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증가 속도가 여전히 가파르다는 점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국채 이자 부담과 고령화 등으로 인한 복지 수요 확대가 정부 부채 증가에 따른 재정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선진국 중심 신 재정위기

과거 재정위기는 1980년대 남미, 1998년 러시아 등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발생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선진국이 부채 증가를 이끌고 있다. 금융위기 당시 각국은 벼랑 끝에 몰린 금융사와 제조업체 등을 살리기 위해 돈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만 주요 선진국 국내총생산(GDP)의 13.2%에 이른다. 하지만 경기는 얼어붙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세수는 줄었다. 국채를 발행해 빚을 얻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이에 따라 부채는 무서운 속도로 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주요 7개국(G7)의 평균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008년 80%에서 지난해 110%로 급증했다. 미국이 76%에서 101.6%까지 늘어난 것을 비롯해 일본은 174%에서 220%, 이탈리아는 106.1%에서 127%로 증가했다. 선진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최근 불거지고 있는 부채 문제가 몰고 올 파장도 과거 개도국의 부채 위기와는 비교가 안된다.

지난 3월 말 현재 1조2500억달러에 달하는 중국의 미국 국채 보유량이 단적인 예다. 미국 국채 금리 급등(국채 가격 하락)이 중국 자산 감소로 이어지는 구조다. 남유럽을 넘어 미국과 일본까지 확산될 수 있는 재정위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한번 늘면 줄이기 힘든 부채 재정위기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빚을 줄여 부채 비율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아일랜드 트리니티대 조사에 따르면 재정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2008년 이후 정부 지출을 줄인 곳은 독일과 스웨덴 몰타 3개국뿐이다. 미국도 시퀘스터(예산 자동 삭감) 등을 통해 재정 적자를 줄이고 있지만 빚은 오히려 늘고 있다.

부채의 ‘하방경직성’이 이유다. 레베카 넬슨 코넬대 교수는 “역사적으로 보면 한번 늘어난 부채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며 “돈을 풀어 경기가 좋아지더라도 정치인들이 국민의 반발을 우려해 쉽사리 세금을 올리거나 정부 지출을 줄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수치상으로도 증명된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은 1875년 이후 136년간 GDP 대비 부채비율이 60%와 100%를 넘은 국가를 뽑아 이후 15년간 부채 변화를 조사했다. 부채비율이 60%를 넘긴 대부분의 국가는 이후 15년간 빚이 이전보다 더 빠르게 늘었다. 통상 ‘위험 수위’로 평가되는 100%를 넘은 뒤에도 조사 대상 국가 중 절반은 빚이 더 증가했다. 1985년 이후를 대상으로 한 유럽중앙은행(ECB) 조사에서도 대부분의 기간에 각국의 부채는 꾸준히 늘었다. 1995~2000년 사이에만 부채가 줄었는데 이는 당시 출범한 유럽연합(EU)이 가입 조건으로 ‘부채비율 60% 이내’를 제시한 데 따른 결과다. ECB는 “외부 강제 없이 개별 국가가 스스로 부채를 줄이기는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앞으로도 더 늘어난다

선진국의 부채는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빚이 늘면 이자 부담도 커진다. 미국 의회 예산처는 지난해 GDP 대비 23.4%인 정부 지출이 2037년 35.7%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국채 이자 부담이 가장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GDP 대비 2% 수준이던 이자 상환 비용이 2037년에는 10%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도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2000년 100명당 27명이던 은퇴자 수는 2050명엔 62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노인 부양비 등 고령화 비용 증가만으로도 2020년엔 GDP 대비 부채비율이 일본은 300%, 영국 200%, 벨기에 프랑스 아일랜드 미국 등은 150%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남윤선/노경목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