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새로운 열정

한때 '나를 위한 음악'에 대한 회의…관객을 바라보며 새로운 열정 찾아

김대진
줄리아드 유학 시절, 무엇보다도 나를 못 견디게 한 것은 그동안 내가 해 온 음악에 대한 회의였다. 나보다 훨씬 많은 재주를 가진 학생도 비일비재했을 뿐 아니라 저 정도쯤이야 하는 친구들도 하나같이 자기 음악에 대한 논리와 색깔을 당당히 이야기하고 자랑스럽게 연주하고 있었다.

과연 내 음악이란 무엇인가,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시간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나 하는 문제에 부딪히면서 나는 한없이 무력해졌다. 다른 것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짧은 인생의 전부를 바친 내 음악의 실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공허함을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황량한 뉴욕의 거리에서 내 음악에 외면당한 쓰라림을 주체할 수 없어 몇 날 며칠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내 음악을 찾고, 음악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널리 전하는 연주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을 정리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열심히 연습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라 밥도, 잠도 거르며 피아노를 쳤던 것 같다. 용케도 이미 다 소진해 버렸을 것 같던 뜨겁고 진한 열정이 끊임없이 솟아올랐던 것을 지금까지 감사한다. 새롭게 펼쳐지는 무한한 음악의 세계에 황홀해하면서 서서히 음악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했고, 더 이상 어떤 바람도 가질 수 없는 완벽한 외곬 열정을 쏟아냈다.

너무 힘들어 손을 내리고 싶을 때마다 바다와 같이 넓고 푸근한 바흐의 미소가 내 연약함을 안아주었고, 가히 신의 솜씨라 할 만한 완벽한 구조물을 이뤄낸 베토벤의 초인적 세계가 나를 채찍질해 주었고, 무한히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선율과 쇼팽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내 가슴을 붉게 물들이면서, 한없이 그들의 위대함을 흠모하고 추앙하는 신도가 돼버렸던 것이다.

식을 줄 모르는 나의 열정은 요즘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나를 향한 무대가 아니라 관중을 향한, 아름다운 사회를 위한 무대라는 점이 어릴 적 동경하던 무대와는 사뭇 달라진 것이다. 내 무대가 가치 있게 펼쳐져 그간의 열정과 아름다운 음악의 세계를 전하면서 내가 있는 곳을 조금이나마 밝게 비추고자 하는 모양으로 다시 타오르고 있다.예전, 용솟음치던 날들의 기억에는 못 미칠지라도 피곤에 지친 온몸에 흐르는 짜릿한 전율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단 한 번의 외도도 없었던 외곬 나의 음악 열정이 언제까지나 가치 있는 모양으로 인생 끝날 때까지 이어지기를 기도해야겠다.

김대진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fadela04@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