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원 중고 의료기 팔려면 600만원 검사필증 받아와라
입력
수정
지면A19
'손톱 밑 대못'이 너무 아픈 의료기기 유통업계중고 의료기기 시장이 과도한 인증비용 때문에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중고 의료기기의 품질과 안전성을 검증하기 위해 지난해 3월 도입한 ‘검사필증제’ 때문이다.
◆“중고 거래 60% 줄었다” 대한의료기기판매협회는 현재 국내에 있는 의료기기 판매업체 수는 약 4만여곳, 판매하는 의료기기 수는 2만여가지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가 중고 의료기기 검사필증제를 시행한 이후 의료기기 유통시장은 크게 위축됐다.
서울 구로에서 중고 엑스레이 장비와 물리치료기 등을 판매하는 P업체 이모 사장은 “중고 기기값보다 인증비용이 더 비싸다”며 “최근 1년 사이에 중고 장비 거래량이 60%나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600만~700만원에 거래되는 일본 올림푸스사의 6년 된 전자내시경은 검사필증 수수료로 700만~800만원을 내야 한다. 미국 스트라이커가 만든 중고 관절경(관절 내 변화를 촬영하는 장치)은 시세가 2000만원인데 수수료는 1000만원가량이다. 100만원인 중고 초음파진단기 인증비용이 600만원인 사례도 있다.
영등포역 인근의 S의료기 윤모 사장은 “25만원짜리 중고 물리치료기를 팔기 위해 검사비 40만원을 내야 한다”며 “새 제품이 50만원인데 거래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제조사가 중고 기기 검증
중고 기기 검증 비용이 비싼 이유 중 하나는 해당 제품의 제조업체가 품질 인증을 하도록 식약처가 지정했기 때문이다. 그 제품을 가장 잘 아는 회사가 제조업체라는 이유에서다. 신제품 판매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중고 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일부 업체가 과도한 검증 비용을 요구하고 있다.
다음달 정형외과 개원을 준비하는 한 의사는 “수술실 장비를 뺀 검사 및 진단 장비를 중고 제품과 적절히 섞어 사면 1억5000만원이면 되지만 새 제품으로 갖추려면 3억~4억원이 들어간다”며 “인증비용 문제 때문에 좋은 물건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폐원하는 의사들도 제값에 팔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조사 “검증시설 부담 크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중고 의료기기 품질인증을 해준 뒤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을 지느냐”며 “품질인증을 위한 인력과 장비, 시설을 별도로 갖추는 데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조업체 관계자는 “사용 기간과 상태가 다른 제품을 받아 체크하고 고치려면 새 제품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며 “일반 가전제품과 달리 수년간 병원에서 사용한 제품이기 때문에 위생 문제도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폭리를 취하는 일부 수입·제조업체 때문에 국내 의료기기 제조업체들의 평판이 나빠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곳도 많다. 경기 안양시에서 특수 치료기를 만드는 제조업체 K사는 의사끼리 중고 의료기기를 거래하는 경우 AS 수준의 점검료만 받고 인증을 내주고 있다. 이 업체 관계자는 “수수료를 많이 받으면 거래처인 의사들로부터 제품에 대한 평판이 깎인다”며 “자사 중고 장비에 대한 AS나 보상판매 등 오히려 추가한 서비스가 더 많다”고 말했다. 초음파진단기를 제조하는 T기업 관계자는 “식약처가 검사수수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자체적으로 인증비용을 낮추기는 쉽지 않다”며 “이런 맹점을 이용해 인증을 돈벌이로 삼아 과다한 수수료를 요구하는 업체가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