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쾌유 빌며 희망가 불렀죠"…"형님 덕분에 기적 일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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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現 시인협회장 김종해·종철 형제…詩로 극복한 췌장암‘소문만으로도 더 빨리 중환자가 되었다/안됐구먼, 그 팔팔한 양반이!/조심스레 격려 전화와 문자가 찍혔다/힘내, 파이팅!/나는 종목도 없는 운동선수로 기재되었다/이길 수 없는 경기에만 나오는 선수다’(‘오늘의 조선간장’ 부분)
형제 암 투병기와 응원의 시
계간 '시인동네' 봄호에 실려
‘팔팔하던’ 중진 시인에서 가망이 없는 말기 암 환자로, 다시 건강한 모습의 한국시인협회장으로. 1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다. 차기 시인협회장(제39대)으로 추대된 김종철 시인(67)의 얘기다. 혼자 암을 이겨낸 건 아니다. 그는 “형님 덕분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34대 시인협회장을 지낸 친형 김종해 문학세계사 주간(73)이다. 영별(永別)을 눈앞에 뒀다가 최초의 형제 시인협회장으로 운명이 바뀐 두 사람을 5일 서울 신수동에서 만났다. “해마다 해 온 건강검진이었는데, 이번엔 의사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데요. 췌장암이 벌써 간으로 전이됐고 6개월에서 길어야 1년 남았다고 했어요. 허 참, 병이 나아서가 아니라 죽으려고 퇴원하는 경우를 제가 겪더군요.”
김 시인은 지난해 7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지만 갑작스러운 통보에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는 “진정한 기도는 겨울나무처럼 가지를 다 쳐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면서도 “다 쳐내니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가 남았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그 기도까지 붙잡았다”고 했다.
죽음 앞에 선 그를 다잡은 건 호방한 성격의 아우를 어릴 때부터 자상하게 챙겨준 김 주간이었다. 그는 “동생의 소식을 듣는 순간 7월 폭염의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었다”고 회고했다. 치료차 도쿄로 건너간 동생을 문자메시지로 응원했다. 일흔이 훌쩍 넘은 형의 단정한 문자메시지에 형제애가 묻어났다. ‘힘들지만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 천천히 고비를 넘자. 나도 내 삶을 사는 것 같지 않다. 감사하는 마음 기도로 풀자. 형이.’
‘성공적인 간 수술 소식은 들었다. 자, 이제부터 다음 계단을 차근차근 밟자. 마음 안에서 즐거운 교감을 갖도록 하자. 형이.’
‘추석 연휴 지나니 소슬한 가을이다. 변한 것이 없는 서울이다. 좀 더 치유 쪽으로 몸을 추슬러 가자. 형이.’ 동생의 쾌유를 빌며 시도 써내려 갔다.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선량한 아우의 삶이 그러듯/아열대 사바나의 누 떼가 그러듯/(…)/사망의 골짜기는 깊고 어둡다고/사람들은 탄식하지만/그것 또한 하느님이 내린 계시/(…)/오늘밤 하늘을 올려다보며/투병 중인 아우의 쾌유를/화살기도의 맨 첫머리에 매달아 쏜다’(‘화살을 쏘다’ 부분)
기적이 일어났다. 도쿄에서의 중입자가속기 치료가 효과를 발휘했다. 원래 건강한 체질이었던 김 시인은 거짓말처럼 회복해 완치 판정을 받고 지난해 11월 말 서울로 돌아왔다. “성탄절 때 고해성사를 보려고 긴 줄의 끝에 섰는데, 예전 같으면 짜증 났을 기다림이 정말 행복하더군요. 불편한 곳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제가 살았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시단은 돌아온 그를 반겼다. 박두진문학상과 영랑시문학상을 안겼고 오는 22일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차기 시인협회장까지 맡겼다. 형제 시인이 더러 있었지만 형제 모두가 시인협회장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죽어가던 가족이 환생해 돌아온 느낌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시로도 표현하기 힘든 기쁨이죠. 저보다 더 회장직을 잘해낼 거라 믿습니다.”
“시인협회장을 한다고 시사(詩史)에 영원히 남는 것도 아니고, 시인은 좋은 시만 쓰면 되지요. 이런 겸손한 마음으로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형제의 암 투병기와 응원의 시는 오는 10일쯤 나오는 계간 시인동네 봄호에 실린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