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짱 토론] 호봉제 임금체계 바꿔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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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60세 정년법안’이 통과되고 12월 대법원에서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면 통상임금’이라는 판결을 내린 뒤 재계와 노동계에서는 임금체계 개편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법원 판결 직후 ‘성과·직무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전환하자’는 성명을 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월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하는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다’라는 노사 지도지침을 발표했다. 노동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부가 3월 내놓은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은 이미 불붙은 임금체계 개편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경제계는 “통상임금 확대, 정년 60세 연장 등으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커지면서 결국 고용시장도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며 “호봉제를 축소하고 직무와 성과에 연동한 임금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임금체계 개편에 힘을 실었다. 반면 노동계는 “정부와 기업이 합세해 연공급(호봉제)을 성과급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근로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겠다는 것”이라며 “성과급은 평가의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근로자 간 위화감 조성으로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 9~1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사정소위에서도 이를 두고 노사정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통상임금 확대, 정년연장 등과 맞물려 있는 임금체계 개편 문제는 노사가 맞서면서 올해 기업현장 임단협 교섭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이를 두고 김동배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와 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지상 논쟁을 벌였다. 김 교수는 임금체계 개편과 성과급제 도입은 별개의 문제라며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황 선임연구위원은 근로자들의 생활 안정을 보장하는 호봉제가 성과급에 비해 인건비 부담이 크지 않다는 견해다.찬성 고령화로 호봉제 비용 급증…'일 중심 임금' 돼야 고용보장
호봉제는 ‘일’이 아니라 근속 연수 등 ‘인적 속성’이 기본급을 결정하는 연공급의 대명사다. 세 사람이 컨베이어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성과(속도정확성) 차이가 없다고 보자. ‘사례1: 중졸은 100, 대졸은 150, 박사는 200의 임금을 받는다.’ ‘사례2: 근속 1년차는 100, 10년차는 150, 20년차는 200의 임금을 받는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사례2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례2는 호봉제에 의해 기본급이 결정되는 전형적인 연공급이다. 반면 직무급에 익숙한 사람들은 두 사례 모두 불공정하게 여길 것이다. 두 사례 모두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나 ‘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라는 원칙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물론 연공급도 과거에는 합리성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 고령화가 덜 진척돼 평균연령이 낮았던 시기에 연공급은 기업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장기근속에 따른 숙련기술 축적과 개발은 기술개량을 통한 캐치업(따라잡기) 전략과 맞아떨어졌고, 고도성장기에는 연공급으로 인한 인건비 부담도 제품가격으로 전가할 수 있었다. 연공급은 생활보장 기능과 함께 근로자의 애사심을 증가시키고 장기적으로 노사관계 안정화에도 기여했다.
한국 저성장시대 진입…기업들 임금인상 재원 부족
그러나 상황은 이미 변했거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고령화와 정년연장, 그리고 저성장이다. 특히 저성장 시기에는 임금인상 재원 부족으로 기존 호봉급 유지 자체가 곤란해진다.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자동승급 대신에 고과승급을 실시하거나, 호봉에 따른 임금상승 폭을 완화하거나, ‘일’ 중심으로 연공급 임금체계를 바꾸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상황은 점점 더 후자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저성장은 임금재원, 즉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고령화정년연장은 연공급의 비용 부담을 가중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지속가능한 임금체계는 개인이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데 공헌한 만큼만 임금을 받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공헌 정도는 근속연령학력과 같은 인적속성이 아니라 수행하는 ‘역할’의 크기나 담당하는 ‘직무’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이처럼 ‘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은 필연적인 귀결로 보인다. ‘임금은 받는 것이 아니라 벌어들이는 것이다’라는 어느 일본 기업 노조위원장의 말은 이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임금체계 개편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우선 임금체계 개편을 일방적인 임금삭감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심각한 오해는 임금체계 개편과 성과급을 혼동하는 것이다. 임금체계와 승급방식을 구분하지 않는 용어 사용이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직무성과급’이라는 표현인데, 직무급은 기본급을 ‘직무 가치’에 따라 결정한다는 임금체계를, 성과급은 결정된 기본급을 평가에 따라 차등 인상한다는 승급관리 방식을 지칭한다.
기본급 결정 방식과 기본급의 승급관리 방식은 전혀 별개의 차원으로, ‘연공성과급’ ‘직능성과급’ ‘직무고정급’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미국 노동조합원의 직무급은 평가에 따른 차등 인상이 없기 때문에 굳이 표현한다면 ‘직무고정급’이다. 이처럼 완전히 별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체계 개편=성과급 도입’이라는 주장은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최근 한국GM의 연봉제 폐지 사례를 임금체계 개편에 대한 반대 논거로 인용하는 것은 대표적 사례다. 이 사례는 연공급에서 직무급 또는 직무급에서 연공급으로의 임금체계 개편이 아니라, 기존 임금체계에서 승급관리 방식의 변화에 불과하다.
생활보장 기능을 근거로 연공급 개편을 반대하는 논리도 다분히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취약한 사회보장제도를 감안하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취약한 사회보장은 사회보장제도의 개편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다. 무엇보다 생활보장은 임금체계가 아니라 임금수준의 문제이며, 임금수준 문제는 생산성 향상으로 해결해야 한다.日 40세 이후엔 직무급 종신고용 유지로 이어져
과연 우리가 연공급체계를 ‘일’ 중심의 임금체계로 개편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여러모로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일본의 임금체계 개편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임금의 연공성을 최대한 없애고 ‘일’ 중심의 임금체계를 도입해왔다. 그 결과 대체로 40세 이후에는 연령(근속)에 따라 임금이 상승하지 않는, 즉 연령이 아니라 역할이나 직무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는 ‘일’ 중심의 임금체계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임금체계 개편이 저성장고령화시기에 일본식 종신고용을 유지하게 하고 일본이 고령자 고용의 모범국가가 되는 기반이 아니었을까? 올해부터 정년 65세가 법으로 강제되지만 임금체계 개편에 성공한 일본은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정진호 한국노동연구원 박사에 의하면 한국은 임금의 연공성이 매우 강하고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임금의 연공성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처럼 강력한 연공급 임금체계로는 저성장고령화와 날로 격화되는 글로벌 경쟁에서 기업의 생존성장과 고용의 유지창출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반대 성과급 확산 땐 임금 하락…소비 부진으로 내수 더 악화
최근 한국GM 노사가 큰 틀에서 과거의 호봉제로 돌아가기로 합의함으로써 기업 현장에서는 정부가 제시한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과 반대로 가는 현상이 빚어졌다. 사무직 근로자의 임금체계를 2003년부터 실시했던 성과 중심의 연봉제에서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는 연공급제(호봉제)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한국GM의 이런 결정은 성과 중심의 임금제도가 불러온 여러 문제 때문이었다. 성과임금은 근로자 간 임금격차를 확대시키고, 근로자 간 위화감 조성으로 사기를 저하시키며, 지나친 경쟁을 조장해 팀워크 저해 등 협력적 조직문화를 파괴할 수 있다. 또한 평가제도의 불공정 문제가 항상 따라다니고, 단기적인 성과나 업적에 지나치게 치중하느라 개인 및 부서 간 협력과 공동사업을 어렵게 할 수 있다.
한국의 임금체계는 1987~1988년 이후 연공성이 강화되다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7~1998년을 기점으로 연봉제와 성과주의 임금체계가 도입돼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연공급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근로자간 성과임금 격차, 조직 팀워크 저해 부작용
연공급이 지배적인 임금체계로 유지되는 이유는 근로자에게 여러 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근속기간 증대나 연령 상승에 따른 생활비 상승을 잘 반영한다는 장점이 있다. 근로자에게는 임금이 주요한 소득의 원천이므로, 임금은 일차적으로 생계비를 확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조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둘째, 근속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므로 사용자의 자의적인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공급은 근속이나 연령 등과 같은 고정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므로, 비슷한 근속이나 연령에 속한 근로자들은 비교적 동일한 임금을 받게 된다. 따라서 연공적 임금체계는 평가기준의 객관성에 관한 논란이나 사용자의 인사고과 개입의 여지가 적은 편이다.
연공급은 해외에서도 보편적인 방식이다. 기업이 연공서열에 따라 증가하는 임금을 지급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은 인적자본이론, 이연보수이론, 효율임금이론, 암묵적 계약이론, 직무일치이론, 생계비이론 등 다양하다.
이들 이론은 공통적으로 연공임금체계가 인적자본 투자에 대한 보상, 우수 인력의 장기근속 유도, 생애에 걸친 안정적인 임금 상승 보장 등과 같이 노동시장에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는 ‘연공임금의 경제적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GM과 같이 기업들이 성과주의 인사제도의 부작용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연공임금의 타당성에 대한 이론을 개발하고 검증하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연공임금과 생산성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연공급과 생산성은 무관하고, 임금체계 유형과 임금수준 비교 연구를 봐도 호봉제가 직능·직무급보다 인건비 부담이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노사가 새로 합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호봉급을 시행하던 기업이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임금체계를 개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임금개편 논의 기업일변도…근로자 참여 보장해야
기업이 연공급 등 다양한 형태의 임금제도를 통해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우수한 인재의 유인 및 유지, 근로자들에 대한 동기부여 및 성과 유지를 위해서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근로자의 공감대가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공정한 보상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근로자의 태도와 조직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는 데는 분배적 결과보다는 절차 공정성이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해 기업은 보상제도 설계 및 실행 시 근로자 참여를 제도화하고, 보상절차를 공식화하며, 갈등의 해결을 위한 공정한 메커니즘을 수립하는 등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임금체계 개편 논의는 근로자 참여가 이뤄지지 않은 채 개별 기업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실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통상임금 논란에서 촉발된 임금체계 개편의 주요 목적이 고정급을 줄이고 변동성이 큰 성과임금 비중을 확대함으로써 임금수준을 하락시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 경제상황 변동에 따른 위험을 근로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가계 구매력 감소에 따른 내수 부진이 한국 경제의 성장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보상인 노동소득분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1997년 75.8%에서 2011년 68.2%)했고, 실질임금은 최근 20여년 동안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이 연공적 임금체계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지적하는 성별·고용형태별·기업규모별 임금 격차와 중고령 근로자의 조기퇴출, 청년실업, 비정규직의 증가 등은 사업장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 영세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계와 이로 인한 지급 능력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임금체계 개편을 개별 기업의 문제로 국한한다면 오히려 임금 격차는 확대될 것이고, 일자리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따라서 임금체계 개편과 관련해 초기업단위에서의 사회적 대화가 이뤄져야한다.
■ 읽을 만한 자료△정년 60세 시대 인사관리(한국인사관리학회, 호두나무, 2014) △임금체계의 실태와 정책과제(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2013) △일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I, II(신광영·이병훈 외 지음, 한울아카데미, 2010)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법원 판결 직후 ‘성과·직무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전환하자’는 성명을 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월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하는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다’라는 노사 지도지침을 발표했다. 노동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부가 3월 내놓은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은 이미 불붙은 임금체계 개편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경제계는 “통상임금 확대, 정년 60세 연장 등으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커지면서 결국 고용시장도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며 “호봉제를 축소하고 직무와 성과에 연동한 임금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임금체계 개편에 힘을 실었다. 반면 노동계는 “정부와 기업이 합세해 연공급(호봉제)을 성과급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근로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겠다는 것”이라며 “성과급은 평가의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근로자 간 위화감 조성으로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 9~1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사정소위에서도 이를 두고 노사정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통상임금 확대, 정년연장 등과 맞물려 있는 임금체계 개편 문제는 노사가 맞서면서 올해 기업현장 임단협 교섭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이를 두고 김동배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와 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지상 논쟁을 벌였다. 김 교수는 임금체계 개편과 성과급제 도입은 별개의 문제라며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황 선임연구위원은 근로자들의 생활 안정을 보장하는 호봉제가 성과급에 비해 인건비 부담이 크지 않다는 견해다.찬성 고령화로 호봉제 비용 급증…'일 중심 임금' 돼야 고용보장
호봉제는 ‘일’이 아니라 근속 연수 등 ‘인적 속성’이 기본급을 결정하는 연공급의 대명사다. 세 사람이 컨베이어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성과(속도정확성) 차이가 없다고 보자. ‘사례1: 중졸은 100, 대졸은 150, 박사는 200의 임금을 받는다.’ ‘사례2: 근속 1년차는 100, 10년차는 150, 20년차는 200의 임금을 받는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사례2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례2는 호봉제에 의해 기본급이 결정되는 전형적인 연공급이다. 반면 직무급에 익숙한 사람들은 두 사례 모두 불공정하게 여길 것이다. 두 사례 모두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나 ‘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라는 원칙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물론 연공급도 과거에는 합리성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 고령화가 덜 진척돼 평균연령이 낮았던 시기에 연공급은 기업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장기근속에 따른 숙련기술 축적과 개발은 기술개량을 통한 캐치업(따라잡기) 전략과 맞아떨어졌고, 고도성장기에는 연공급으로 인한 인건비 부담도 제품가격으로 전가할 수 있었다. 연공급은 생활보장 기능과 함께 근로자의 애사심을 증가시키고 장기적으로 노사관계 안정화에도 기여했다.
한국 저성장시대 진입…기업들 임금인상 재원 부족
그러나 상황은 이미 변했거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고령화와 정년연장, 그리고 저성장이다. 특히 저성장 시기에는 임금인상 재원 부족으로 기존 호봉급 유지 자체가 곤란해진다.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자동승급 대신에 고과승급을 실시하거나, 호봉에 따른 임금상승 폭을 완화하거나, ‘일’ 중심으로 연공급 임금체계를 바꾸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상황은 점점 더 후자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저성장은 임금재원, 즉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고령화정년연장은 연공급의 비용 부담을 가중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지속가능한 임금체계는 개인이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데 공헌한 만큼만 임금을 받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공헌 정도는 근속연령학력과 같은 인적속성이 아니라 수행하는 ‘역할’의 크기나 담당하는 ‘직무’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이처럼 ‘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은 필연적인 귀결로 보인다. ‘임금은 받는 것이 아니라 벌어들이는 것이다’라는 어느 일본 기업 노조위원장의 말은 이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임금체계 개편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우선 임금체계 개편을 일방적인 임금삭감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심각한 오해는 임금체계 개편과 성과급을 혼동하는 것이다. 임금체계와 승급방식을 구분하지 않는 용어 사용이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직무성과급’이라는 표현인데, 직무급은 기본급을 ‘직무 가치’에 따라 결정한다는 임금체계를, 성과급은 결정된 기본급을 평가에 따라 차등 인상한다는 승급관리 방식을 지칭한다.
기본급 결정 방식과 기본급의 승급관리 방식은 전혀 별개의 차원으로, ‘연공성과급’ ‘직능성과급’ ‘직무고정급’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미국 노동조합원의 직무급은 평가에 따른 차등 인상이 없기 때문에 굳이 표현한다면 ‘직무고정급’이다. 이처럼 완전히 별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체계 개편=성과급 도입’이라는 주장은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최근 한국GM의 연봉제 폐지 사례를 임금체계 개편에 대한 반대 논거로 인용하는 것은 대표적 사례다. 이 사례는 연공급에서 직무급 또는 직무급에서 연공급으로의 임금체계 개편이 아니라, 기존 임금체계에서 승급관리 방식의 변화에 불과하다.
생활보장 기능을 근거로 연공급 개편을 반대하는 논리도 다분히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취약한 사회보장제도를 감안하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취약한 사회보장은 사회보장제도의 개편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다. 무엇보다 생활보장은 임금체계가 아니라 임금수준의 문제이며, 임금수준 문제는 생산성 향상으로 해결해야 한다.日 40세 이후엔 직무급 종신고용 유지로 이어져
과연 우리가 연공급체계를 ‘일’ 중심의 임금체계로 개편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여러모로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일본의 임금체계 개편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임금의 연공성을 최대한 없애고 ‘일’ 중심의 임금체계를 도입해왔다. 그 결과 대체로 40세 이후에는 연령(근속)에 따라 임금이 상승하지 않는, 즉 연령이 아니라 역할이나 직무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는 ‘일’ 중심의 임금체계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임금체계 개편이 저성장고령화시기에 일본식 종신고용을 유지하게 하고 일본이 고령자 고용의 모범국가가 되는 기반이 아니었을까? 올해부터 정년 65세가 법으로 강제되지만 임금체계 개편에 성공한 일본은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정진호 한국노동연구원 박사에 의하면 한국은 임금의 연공성이 매우 강하고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임금의 연공성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처럼 강력한 연공급 임금체계로는 저성장고령화와 날로 격화되는 글로벌 경쟁에서 기업의 생존성장과 고용의 유지창출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반대 성과급 확산 땐 임금 하락…소비 부진으로 내수 더 악화
최근 한국GM 노사가 큰 틀에서 과거의 호봉제로 돌아가기로 합의함으로써 기업 현장에서는 정부가 제시한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과 반대로 가는 현상이 빚어졌다. 사무직 근로자의 임금체계를 2003년부터 실시했던 성과 중심의 연봉제에서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는 연공급제(호봉제)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한국GM의 이런 결정은 성과 중심의 임금제도가 불러온 여러 문제 때문이었다. 성과임금은 근로자 간 임금격차를 확대시키고, 근로자 간 위화감 조성으로 사기를 저하시키며, 지나친 경쟁을 조장해 팀워크 저해 등 협력적 조직문화를 파괴할 수 있다. 또한 평가제도의 불공정 문제가 항상 따라다니고, 단기적인 성과나 업적에 지나치게 치중하느라 개인 및 부서 간 협력과 공동사업을 어렵게 할 수 있다.
한국의 임금체계는 1987~1988년 이후 연공성이 강화되다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7~1998년을 기점으로 연봉제와 성과주의 임금체계가 도입돼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연공급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근로자간 성과임금 격차, 조직 팀워크 저해 부작용
연공급이 지배적인 임금체계로 유지되는 이유는 근로자에게 여러 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근속기간 증대나 연령 상승에 따른 생활비 상승을 잘 반영한다는 장점이 있다. 근로자에게는 임금이 주요한 소득의 원천이므로, 임금은 일차적으로 생계비를 확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조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둘째, 근속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므로 사용자의 자의적인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공급은 근속이나 연령 등과 같은 고정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므로, 비슷한 근속이나 연령에 속한 근로자들은 비교적 동일한 임금을 받게 된다. 따라서 연공적 임금체계는 평가기준의 객관성에 관한 논란이나 사용자의 인사고과 개입의 여지가 적은 편이다.
연공급은 해외에서도 보편적인 방식이다. 기업이 연공서열에 따라 증가하는 임금을 지급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은 인적자본이론, 이연보수이론, 효율임금이론, 암묵적 계약이론, 직무일치이론, 생계비이론 등 다양하다.
이들 이론은 공통적으로 연공임금체계가 인적자본 투자에 대한 보상, 우수 인력의 장기근속 유도, 생애에 걸친 안정적인 임금 상승 보장 등과 같이 노동시장에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는 ‘연공임금의 경제적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GM과 같이 기업들이 성과주의 인사제도의 부작용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연공임금의 타당성에 대한 이론을 개발하고 검증하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연공임금과 생산성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연공급과 생산성은 무관하고, 임금체계 유형과 임금수준 비교 연구를 봐도 호봉제가 직능·직무급보다 인건비 부담이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노사가 새로 합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호봉급을 시행하던 기업이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임금체계를 개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임금개편 논의 기업일변도…근로자 참여 보장해야
기업이 연공급 등 다양한 형태의 임금제도를 통해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우수한 인재의 유인 및 유지, 근로자들에 대한 동기부여 및 성과 유지를 위해서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근로자의 공감대가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공정한 보상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근로자의 태도와 조직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는 데는 분배적 결과보다는 절차 공정성이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해 기업은 보상제도 설계 및 실행 시 근로자 참여를 제도화하고, 보상절차를 공식화하며, 갈등의 해결을 위한 공정한 메커니즘을 수립하는 등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임금체계 개편 논의는 근로자 참여가 이뤄지지 않은 채 개별 기업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실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통상임금 논란에서 촉발된 임금체계 개편의 주요 목적이 고정급을 줄이고 변동성이 큰 성과임금 비중을 확대함으로써 임금수준을 하락시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 경제상황 변동에 따른 위험을 근로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가계 구매력 감소에 따른 내수 부진이 한국 경제의 성장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보상인 노동소득분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1997년 75.8%에서 2011년 68.2%)했고, 실질임금은 최근 20여년 동안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이 연공적 임금체계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지적하는 성별·고용형태별·기업규모별 임금 격차와 중고령 근로자의 조기퇴출, 청년실업, 비정규직의 증가 등은 사업장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 영세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계와 이로 인한 지급 능력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임금체계 개편을 개별 기업의 문제로 국한한다면 오히려 임금 격차는 확대될 것이고, 일자리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따라서 임금체계 개편과 관련해 초기업단위에서의 사회적 대화가 이뤄져야한다.
■ 읽을 만한 자료△정년 60세 시대 인사관리(한국인사관리학회, 호두나무, 2014) △임금체계의 실태와 정책과제(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2013) △일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I, II(신광영·이병훈 외 지음, 한울아카데미, 2010)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