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결제소 대체한 Fed…금융안정 내세운 정부 권력욕 산물

스토리&스토리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33) 美 1907년 금융위기와 Fed 탄생

뉴욕 3대 신탁사 니커보커, 구리 가격 상승에 베팅
예상과 달리 구리값 하락…대규모 예금인출 사태 발생
1907년 금융위기 사건으로 중앙은행 필요성 주장 늘어
1914년 Fed 출범 이어져

하지만 Fed 생긴 이후에도 경기침체·통화가치 상승 반복

한국경제·한국제도경제학회 공동기획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타협이 이뤄질 때까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마시오!”

미국 최고의 은행가인 JP모간이 은행가들을 자신의 개인 서재로 불러들인 뒤 문을 잠가버리면서 한 말이다.

1907년 10월 미국 주식시장은 폭락했고, 전국적으로 예금주들이 돈을 찾겠다면서 상업은행과 신탁회사로 몰려가 아우성을 쳤다. 이틀 만에 12개의 주요 신탁회사가 파산했다. 신용시장은 얼어붙었고, 주식거래는 막혔으며 증시는 폭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JP모간이 나선 것이다. 서재에 감금되다시피 한 은행가들은 마침내 유동성 위기에 몰린 은행에 대한 긴급 유동성 제공에 동의했고, 이로써 1907년의 금융위기는 진정됐다.

세상에 익히 알려진 위기의 발단과 과정은 이렇다. 뉴욕에서 세 번째로 큰 신탁회사였던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소유주인 하인스와 바니는 조만간 구리값이 올라 큰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유나이티드코퍼 주식을 사들였다. 종국적으로는 이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구리 가격이 하락했고, 유나이티드 코퍼의 주식은 폭락했다.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상황을 인지한 상업은행이 이 회사의 수표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자 투자금을 날릴까 두려움에 휩싸인 니커보커 트러스트 고객들이 자신의 돈을 찾기 위해 회사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다른 은행과 신탁회사의 고객들도 앞다퉈 예금인출에 나섰다. 이 예금인출 사태가 전국으로 번지면서 1907년 패닉이 촉발됐다. 이 사태로 미국 증시는 1893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1907년의 금융위기가 관심을 끄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위기가 중앙은행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마지막 금융위기였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실패를 탓할 수 없는 금융위기였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즉 금융위기는 “우리 경제 제도의 바탕을 황폐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자행하는”(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주식 투기꾼들의 책임으로 귀착된다. 나아가 이 주장은 금융위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금융시장과 금융회사를 규제하고 통제하는 중앙은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져 1914년 마침내 미국 중앙은행(Fed) 출범이라는 결실을 본다.그런데 과연 정책 실패는 없었던 것일까? 당시 미국은 국법은행제도(National Banking System)를 택하고 있었다. 국법은행법에 따라 은행의 지점 설치가 금지됐다. 이는 대형 은행의 출현을 막고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은행 산업 자체를 매우 불안정하게 했고 외부 충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또한 국법은행법은 은행권 발행을 보증하는 자산의 종류를 정부채권으로만 제한했다. 국법은행이 고객에게 은행권(현금)을 제공하고자 할 때마다 정부채권을 구입해 은행권을 인쇄해주는 워싱턴의 통화감독청에 제출해야 했다. 이런 규제로 인해 은행권 공급이 변동하는 현금 수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유동성 부족 현상이 주기적으로 발생했다. 유동성이 부족할 때는 이웃 캐나다 은행들의 은행권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었다.

중앙은행은 없었지만 은행권을 발행하는 국법은행들을 관리 감독하고 통화 공급을 조절하는 통화정책의 기능을 수행하는 주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재무부는 공개시장 조작이나 지급준비율 통제와 같은 통화정책 수단을 사용했으며, 위기 시에는 정부 자금을 특정 은행에 예치하는 방식으로 통화 공급을 늘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재무부는 자신들이 중앙은행 역할을 잘해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6년 연차보고서에서 레슬리 쇼 장관은 재무부가 중앙은행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중앙은행의 부재가 곧 정책 실패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 설립의 명분이었던 금융위기의 재발 방지 효과는 어떤가. 1914년 Fed 출범 이후에 경기침체는 반복됐고, 인플레이션 역시 끊임없이 지속됐다. 1929년 주식시장 폭락과 1930년대 대공황, 1970년대 오일쇼크에는 속수무책이었고, 2000년의 닷컴주 투기 붐과 최근의 모기지시장 과열로 인한 금융위기와 관련해서도 사전에 차단하기는커녕 거품을 더 키운 것이 아니냐는 비난마저 듣는다.1907년의 금융위기 당시 미국에 중앙은행은 없었지만 오늘날의 중앙은행이 하는 역할인 ‘은행의 은행’ 및 ‘최종대부자’ 역할은 민간결제소가 맡아 수행했다. 은행 연합체로서의 결제소는 회원은행이 갑작스러운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금을 매개하는 기능을 함으로써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유동성 부족을 겪는 은행에 결제소가 직접 대출함으로써 최종대부자 역할도 담당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Fed가 설립되기 전에 발생했던 크고 작은 금융위기 때 도시의 결제소들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은행에 대출을 해주는 민간 최종대부자 역할을 했다. 1907년의 금융위기 때는 JP모간을 비롯한 몇몇 대형 은행가들이 그 역할을 한 것이다.

민간결제소의 또 다른 장점은 자율규제에 있다. 결제소는 회원 은행들에 대한 검사와 감독을 실시해 영업상태가 좋은 은행과 그렇지 못한 은행을 구분했다. 자체 규정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은행은 제명했다. 협회에서 제명되면 청산과 결제 비용이 크게 증가할 뿐 아니라 은행 평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외부의 힘, 즉 정부의 규제와 개입이 없더라도 협회에서 요구하는 요건을 잘 지켰다. 이를 통해 중앙은행 설립 이전에 있었던 금융위기들이 조기 진화될 수 있었고 위기의 규모도 크지 않았다.

하나의 큰 사건은 새로운 규제를 만들고 그 규제를 집행할 기관을 설립하는 구실로 작용하며, 그 과정에서 정부의 힘과 규모는 확대된다. 1907년의 금융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닉 순간 월스트리트의 금융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어 체면을 구기고 자존심에 손상을 입은 정부관료들은 그런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중앙은행 설립을 밀어붙였다.이렇게 탄생한 Fed는 민간이 자율적으로 하던 역할을 제대로 대체하지도 못했다. 중앙은행의 정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명망 높은 사기이자 가장 우아한 현실도피”(존 갤브레이스)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