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유차영 유해발굴감식단장 "산야에 잠드신 13만 용사…가족 품에 보내드리는 게 국가 의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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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맞은 유차영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무명(無名)의 용사인 이들을 국가가 나서 한분 한분 확인해야 비로소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아들인 고유명사로 불릴 수 있습니다.”
참호 속 '경계모습' 발굴…60년간 나라 지키고 계셨다
파낸 땅 길이 서울~부산 왕복하고도 남을 것
유해 처음 보는 신세대 장병들, 애국에 대해 다시 생각
유차영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대령·3사 17기)을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유해발굴감식단 사무실에서 최근 만났다. 그는 “13만여구의 호국 영령이 여전히 산야에 잠들어 있다”며 “이 사업은 전사 실종자를 기다리는 유가족의 열망을 채워주고 전사자에 대한 예우를 다하기 위한 국가적 과업”이라고 강조했다.유 단장은 발굴단 창설을 주도하면서 7년간 재임한 전임 박신한 단장의 뒤를 이어 작년 8월 취임했다. 그는 “화마에 그슬려 변색된 유골을 볼 때마다 나라를 위해 스러져간 국군 용사들이 겪은 치열했던 전투가 짐작된다”고 했다. 그는 매일 출근길에 현충원에 안장된 용사의 무덤에 인사를 한다. 유 단장은 “소명의식으로 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 단장의 집무실에는 6·25전쟁 당시 세부 전투를 기록한 대형 전황도가 놓여 있었다. 그는 “전투사(史)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발굴 감식에서 전투사가 중요한 이유가 뭔가.
“발굴 지역을 1차적으로 확정하기 위해서다. 세부적인 전투사를 바탕으로 당시 병력의 이동방향과 전투상황을 감안해 지역을 정한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참고해 1년마다 대략적인 발굴 계획을 짠다. 현재 강원 인제 한석산 매봉산과 양구펀치볼 지역, 대전 대둔산, 파주 월롱산 등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현장에선 어떻게 발굴 지점을 정하나.
“지휘관 경험이 필수적이다. 지형을 바탕으로 총격 방향, 적군의 진격로를 감안하고 당시 화력을 고려해 용사들이 숨지거나 매장됐을 법한 지역을 가늠한다.”
▷유골을 보면서 전투 장면을 상상할 수 있나.“국군 6사단 19연대와 중공군 118사단이 전투를 벌인 철원 화천 일대의 993고지 발굴현장에서의 일이다. 발굴된 유해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였지만 왼쪽 정강이에 총을 맞은 흔적이 있었다. 단 한 발의 총격이 상처를 냈고 과다출혈로 서서히 숨진 것이다. 전투 당시 피아(彼我) 모두 정신없는 와중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다른 현장에선 오른쪽 팔뼈가 이쪽에 있고, 대퇴부가 반대편에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포탄에 맞아 돌아가신 것이다. 뼈가 검게 변색된 유골도 있는데, 불에 그슬린 흔적이다.”
▷발굴 과정이 쉽지 않을 듯한데.
“보통 현장은 해발 1500m 이상의 고지다. 현장 요원들이 매일 두세 시간씩 산을 오르내려야 하고 점심식사는 전투식량으로 해결한다. 땅이 파헤쳐져 있다 보니 비가 내린 후엔 진창이 된다. 보통 가로 세로 깊이 약 1m씩 되는 구덩이 150개 정도를 파야 한 구의 유해가 나온다. 그마저도 정강이뼈 한 개, 팔목뼈 한 개 이런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8000여구를 찾았으니 파낸 땅을 길이로 늘어놓는다면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하고도 남을 것이다.”▷발굴 현장이 대부분 고지인 이유는.
“6·25전쟁의 전투사적 양상이 그랬다. 전쟁 초기엔 인명 살상이 우선이 아니었다. 북한 인민군은 전쟁 초기 서울을 고립시키기 위해 수원 등으로 재빨리 진출하려는 기동 전술을 폈다. 평탄한 서부전선이 전장이었다. 이후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고 정전 협상을 벌이는 동안 38선 일대에 전선이 그어졌다. 화력을 운용하는 국군부대를 격멸하는 게 최우선 목표가 된 것이다. 국군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상대 전투원을 살상하기 위해선 높은 곳에 올라가 적을 향해 기총사격을 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용사들이 묻혀 있는 고지는 현재 풀과 나무로 울창하지만, 수많은 교전이 벌어진 그 당시엔 현재 북한보다 더한 민둥산이었을 거다.”
▷유골을 수습할 때 어떤 예(禮)를 갖추나.
“우선 굴토 시작을 알리는 개토식(開土式)을 한다. 기초 굴토를 마치고 유해가 노출돼 수습 직전까지 가면 또 예를 갖춘다. 유해를 전통 한지에 싸고 오동나무 관에 모시고는 태극기로 덮는다. 예단과 혼백을 마련하고 ‘그동안 너무 오래 기다리셨다. 국가의 이름으로 용사님을 모셔가겠다’는 의미로 경례하고 신원 확인, 안장 등의 단계로 넘어간다.”
▷발굴 요원들의 마음가짐도 남다를 것 같다.
“20대 초반의 발굴병들은 대부분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골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유골을 캐내는 과정은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이따금 지시하는 것 이외엔 매우 조용하다. 대부분 유골이 포탄을 맞거나 총을 맞아 몸이 찢긴 상태로 발견된다. 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현장에서 느낄 수밖에 없다. 군생활 중 다른 사람은 하기 힘든 체험을 한다. 전역할 때 즈음이면 사명감을 갖고 임무를 했고 애국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고 얘기하더라.”
▷기억에 남는 발굴 장소는.
“2011년 양구지역 전투호에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발굴된 용사가 있다.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산등성이에 60년간 나라를 지키는 모습 그대로 서 계셨다. 아직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신원 확인 과정은.
“모셔진 유골은 우선 세척과 감별을 거친다. 유해도를 펴 놓고 골편과 치아 등을 바탕으로 연령대를 파악해 한 개체를 확정하는 인류학적 감식을 한다. 이후엔 국방부 중앙감식소에서 유전자 염기서열(DNA)을 분석하는 법의학적 감식을 거친다. DNA가 99.9% 일치해야만 신원을 확정할 수 있다.”
▷유품이 나온다면 신원확인이 수월할 텐데.
“작년 춘천 모래재에서 모셔온 고 김세한 순경이 바로 그런 경우다. 발굴 당시 경찰 버클과 단추 등 특이유품을 발견했다. 기록을 뒤진 끝에 김 순경이 당시 철도경찰로 춘천지구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을 알았다. 고인의 어머니께선 경찰 물건이 발견되면 인민군에게 고초를 당할까 봐 모든 유품을 불태웠지만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정복 한 벌은 남겨뒀다고 했다. 따님이 나중에 감식소로 와 유골을 만지며 ‘나도 아버지가 있는 자식이다’고 울먹였다.”
▷적군의 유해가 나오면.
“발굴된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도 1000구가 넘는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파주의 적군묘지에 안장 후 관리를 해왔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최근 중국군 유해 437구를 돌려보냈다.”
▷임무 중 느끼는 소회나 안타까운 사연은.
“가족을 찾아줬을 땐 슬프고 감동적이면서도, 국가가 의무를 다했다는 뿌듯함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화가 나기도 한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겠다, 만약 다시 전투가 벌어진다면 국민의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격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유 단장은 이사도 가지 않고 국군 전사자 아들을 기다리다 사망한 105세 노모의 사연을 담아 직접 쓴 ‘모정’이라는 시를 보여줬다. 그는 2002년 ‘까치밥’이라는 수필로 등단한 문인이다. “이승을 등지고 여여 등지고/두른두른 서둘러 저승으로 가자/그저 60년 너만 바라 살아왔다/각중에(갑자기) 홀연한 아들/어미를 찾아 저승강을 건너와서/문간 밖에 서성거릴까/삽작문(사립문)도 걸지 못하고/뜬눈으로 지샜다”
▷향후 계획은.
“북한과 협의가 된다면 비무장지대(DMZ) 등의 발굴도 진행할 예정이다. 유해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전사자의 모계와 부계 각각 8촌까지 DNA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현재 3만여개의 샘플을 모았으나 많이 부족하다.”
■ 유해발굴감식단은
6·25 전사자 발굴작업 주도
2007년 창설…8000구 찾아유해발굴감식단은 국방부가 호국보훈사업 일환으로 시행하고 있는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주도하는 조직이다. 주 임무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호국용사의 유해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일이다. 이 사업은 당초 6·25 50주년을 맞은 2000년 육군이 전쟁 당시 경북 칠곡에서 벌어진 다부동전투 전사자의 발굴을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자 2007년 국방부 산하로 유해발굴감식단이 정식 창설됐다. 2008년 ‘6·25전사자유해발굴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본격화됐다. 감식단은 발굴과 감식과 조사과 및 전사자에 대한 예식을 담당하는 영현소대로 이뤄져 있다. 지금까지 유해발굴감식단이 찾은 6·25 전사자 유해는 8000여구에 달한다. 이 중 국군 유해 91구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의 품에 돌려보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