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대화] "막내 주려고 6·25때 인민군 건빵 훔치다 들켰지, 기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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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구우면 아버지·큰형·막내…내 몫은 살점 없는 머리"한 교육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가 나고 자랐다. 6·25전쟁 통에 살림은 넉넉지 않았다. 해어진 옷을 물려입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한 방에서 부대끼며 함께 자라 우애만큼은 두터웠다. 부모는 회초리 한번 들지 않았지만 남매는 밤늦게까지 책상 앞을 지켰다. 여덟 명 가운데 여섯 명이 서울대에 입학하고 한 명은 육군사관학교에 갔다. 두 명의 장관이 나왔다.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이상문 美네브래스카대 교수·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
청춘들에게 한마디
쉽고 편한길 걸으려 하면 안돼…어려운 환경 뚫고 나갈 기백 필요
요즘 '힐링~힐링~' 하는데 아프다고 수면제 주면 잠에서 깼을 때 더 아픈 법
이들 가운데 삼형제가 지난 8일 자리를 함께했다.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81)과 이상문 미국 네브래스카대 경영학 석좌교수(75),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66)이다. 국방과 경영학, 정보통신기술(ICT)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삼형제가 모처럼 마주앉았다. 미국에 사는 이 교수가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범태평양경영학회에 참석하러 왔다가 서울을 찾은 것이다.모인 곳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LG유플러스 사옥. “점심 못 먹었지?” 제자들과의 모임 참석차 춘천에 다녀오느라 약속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게 도착한 이 교수에게 이 전 장관이 말을 건넸다. 70대 중반의 동생이지만 형은 아직도 끼니를 걱정해줬다. “세 시간 넘게 걸렸어.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이 교수) “6·25전쟁 얘기 좀 했어요. 건빵 사건 기억나지요?”(이 부회장)
오랜만에 만난 삼형제가 첫 화제로 올린 ‘건빵 사건’은 지금도 가족들이 모이면 종종 나누는 얘기라고 한다. 이 교수는 열한 살 때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성북국민학교 창고에 몰래 숨어들었다. 먹을 것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다. 고사리손으로 쥔 쌀을 주머니에 넣고 건빵을 챙기는 순간 인민군한테 들켰다. 소년은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뒤에선 총탄이 날아왔다.
“가까스로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왜 그렇게 땀을 흘리니’라고 묻더군요. ‘엄마, 이거 아기 줘’하고 건빵을 내밀었지요. 그 아기가….” 당시 두 살배기 ‘아기’ 동생이었던 이 부회장을 가리키며 이 교수가 웃었다. 교육자 집안이라 본래 풍족한 편이 아니었던 살림은 6·25전쟁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나빠졌다. 이 교수가 목숨을 걸고 건빵을 훔쳐온 것도 이때다. “물만 마시고 낮잠을 많이 잤어요. 축 늘어지니 자기만 하면 먹는 꿈을 꿨죠.”(이 교수) “1·4후퇴 때 기차 타고 고향인 충북으로 온갖 고생을 하며 내려온 여정은 영화로 찍어도 그런 영화가 없을 거예요.”(이 부회장)셋째인 이 전 장관은 전쟁을 계기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6·25전쟁 직후 바로 위의 형(이상혁)과 함께 자원입대한 것이다. 당시 경기중학교 5학년(현재 고2) 때 학도병으로 들어가 1951년 진해에서 입교했다. 육사가 4년제로 바뀐 첫 기수인 11기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동기다. “상혁 형은 서울대 법대 3학년 다니다가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갔지. 육군종합학교라는 게 6·25 때 장교가 부족해서 소위를 속성으로 만드는 곳이었잖아. 진짜 총알받이지.”
문득 궁금했다. “전쟁 때 군대 가는 건 목숨을 거는 거 아닙니까.” 이 전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우리 때 군대 안 가고 병역을 기피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특히 경기고에는 돈 많은 집 자식이 많아서 외국으로들 도망쳤다고.”‘기본’을 중시하는 가정교육 때문이었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교육자 출신이야. 우리에게 항상 정직하라고 가르쳤어. 도망이나 다니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어릴 때도 들더라고.” 이 부회장이 거들었다. “어머니께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어떻게 그때 형들을 사지(死地)로 몰았느냐’고 했더니 ‘그때는 당연히 가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해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고.”
충북 청원이 고향인 형제의 아버지(이창우·2001년 작고)는 원리원칙을 지키는 선비였다. 문교부 장학관과 서울 청계국민학교·사대부속국민학교 교장, 경성고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경성사범을 나와 교사로 일하던 어머니와 결혼해 8남매를 길렀다. 아흔이 넘어서까지 열두 권의 책을 썼다.
9·28 서울 수복 이후 아버지가 서울 청계국민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집안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남매는 공부를 잘했다. 당시 시험을 보고 들어가야 했던 명문중학교인 경기중에 잇따라 진학했다.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하란 얘기는 평생 들어본 적이 없어요. ‘형들이 다 경기중에 가니까 나도 가야 하는구나’라는 생각뿐이었죠.”전공은 다양하게 택했다. 서울대 법학과(상혁), 육사(상훈), 서울대 토목공학과(상진)·경영학과(상문)·성악과(상융)·피아노학과(순자)·전기공학과(상철) 등이다.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부모님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특정 진로를 강요하는 대신 ‘기도’로 자식들을 뒷바라지했다. “절대 자식들 공부 끝날 때까지 주무시지 않았어요. 공부하다 밤 열두시쯤 화장실에 가면서 방문 틈으로 보면 기도하고 계시는 거야. 그럼 ‘에이, 조금 더 할까’ 이렇게 되더라고.”(이 부회장)
이 전 장관은 50년 넘게 군에 몸담아오며 국방부 장관까지 오른 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장을 역임하고 애국단체총협의회 상임의장, 국가원로회의 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월남전에 참전해 맹호사단 혜산진 부대 1대대장을 맡아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기도 했다. 형제 중 가장 먼저 장관을 하며 ‘집안의 기둥’ 역할을 했다. 동생들 중 처음으로 해외 유학을 간 이 교수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것도 그다.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장관 이·취임식 때마다 부모님이 다 참석하셨어. 문장력이 좋고 꼼꼼하신 아버지는 취임사를 전부 다 점검해서 고쳐주셨지.”
이 교수는 경영학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이다. 서울대 졸업 후 미국 마이애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조지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최대 규모 경영학회인 의사결정학회 회장을 아시아 인 최초로 지내기도 했다. 그가 주도해 1984년 만든 범태평양경영학회는 35개국 4000여명의 경영학자들이 참석하는 세계적 학술단체다. “180달러 들고 1961년 유학을 떠나서 학생회관에서 한 시간에 1달러 받고 주말마다 열다섯 시간씩 일했어요. 학생들이 와서 식당에서 먹고 가면 테이블을 닦는 ‘버스보이’ 일을 한 거지. 금요일 오후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있다가 일하러 들어가자마자 오래된 도넛같이 버리는 음식을 끊임없이 먹었죠.”
8남매 중 아버지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건 이 교수였다고 형제들은 입을 모았다. 가장 ‘모범생’이어서란다. “아버지는 바르고 딱 정해진 ‘공맹의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그 길에 가장 맞는 형이 상문 형이었죠. 가장 안 맞았던 형이 토목공학과 갔다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상진 형인데 일 배우겠다고 토목공사 현장 다니면서 술도 많이 마셨어요. 라디오를 화장실에 설치하지 않나, 빵기계를 만들지 않나 특이했지요.”(이 부회장)
이 전 장관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내가 싸움할 때 신는 신발이 있어. 날을 뺀 스케이트 구두지. 그걸 상문이가 부관처럼 늘 갖고 다녔다고. 동생들을 동네에서 감히 건드릴 애들이 없었지.”
막내인 이 부회장은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것이 형들의 평가다. 이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생선을 구우면 제일 좋은 부위는 아버지 드리고 그다음은 큰형, 그다음이 막내 차례였잖아요. 난 살점 없는 머리만 먹었어요. 익숙해져서 그런지 지금도 ‘생선 머리’가 가장 좋아요.”
이 부회장은 국내 ICT 역사의 산 증인이다. 미국 듀크대에서 박사를 따고 미 항공우주국(NASA)의 네트워크 운영사인 ‘컴퓨터사이언시스’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귀국해 한국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냈다. KT 사장과 정보통신부 장관, 광운대 총장을 지내고 LG유플러스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누가 제일 출세했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이 전 장관은 ‘막내’를 추천했다. “형제 중 장관은 내가 제일 먼저 했지만 상철이는 대학 총장했지, KT 사장하고 장관도 해서
공식 직함이 더 많지.”(이 전 장관) 그러자 이 교수가 “하지만 아버지는 형제 중에 가장 출세한 건 나라고 했어요”라고 받았다. 이 부회장은 “아버지가 학자를 제일 좋아하시긴 했지요”라며 웃었다.
여덟 남매의 자녀·손주까지 모두 모이면 서른 명이 넘는다. 자녀들도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 교수의 큰딸은 소설가, 둘째딸은 의대 교수다. 이 부회장의 아들은 대기업에 다니다가 벤처 창업을 했다.젊은이들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형제들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이 전 장관은 “요즘 젊은이들은 한 마디로 ‘이지 웨이, 이지 고(easy way, easy go)’”라고 했다. “쉬운 것만 하고, 안되면 쉽게 다른 걸 하려고 하지. 어려운 환경에서도 뚫고 나갈 수 있는 기백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이 부회장은 한결 따끔하게 세태를 비판했다. “요즘 힐링이다, 힐링이다 하는데 아프다고 수면제 주면 잠에서 일어났을 때 더 아프거든. 술 마시면 술 깼을 때 더 아픈 거고. 진정한 의미의 힐링은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도전정신을 키우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는 친구인 프레드 루단스 네브래스카대 경영학 교수의 ‘긍정심리자본’ 이론을 인용했다. “히어로(hero)가 중요합니다. 희망(hope)이 있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efficacy)과 실패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힘(resilience), 잘 될 거라는 믿음(optimism)이 있으면 뭐든 잘 하고 행복해질 수 있어요.”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