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큰 입, 작은 귀

전혀 듣지 않고 말만 쏟아내는 사회
소통 부족 해결하려면 '경청'해야

안양옥 < 한국교총 회장·서울교대 교수 yangok@kfta.or.kr >
1990년대 중반부터 ‘자기PR 시대’가 열렸다. 자기PR이라는 말은 더 오래전부터 등장하기는 했지만 겸양을 미덕으로 여겼던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민주화 흐름과 X세대 문화의 등장, 이어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자기PR 열풍을 가속화했다.

이런 흐름은 교육 분야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논술과 면접이 대입과 취업의 주요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대입을 앞둔 고교생은 물론 유치원생부터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까지 관련 사교육업체를 드나들며 쓰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데 열을 올렸다.그 때문인지 달변가, 달필가의 시대가 열렸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자신있게 말하고 쓴다. 관심을 끄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하루에도 수천 수만개 글과 댓글이 인터넷에 올라오고 달린다. 지상파, 케이블, 인터넷 등 수백개 채널에서도 누군가의 말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정말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대로 듣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데, 경청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자기 말만 하고 상대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풍경도 자주 본다.

대표적인 게 국회 청문회다. 듣고(聽), 또 들어(聞) 옳은 판단을 하겠다고 모인(會) 것이 청문회인데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제 말만 하는 모습만 보인다. 질문으로 보기 애매한 의혹을 잔뜩 쏟아놓고, 원하는 답이 아니면 말을 끊어버리거나 핀잔을 준다. 청문 대상자도 마찬가지다. 자기 변호에 급급해 동문서답하거나, 질문을 잘못 들은 척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한마디로 ‘입은 크고 귀는 작은’ 청문회가 된 지 오래다.자기표현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자 권리다. 그렇다고 이를 맘껏 발산하고 누리는 것이 공공의 행복을 보장하진 않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설화(舌禍)는 오히려 모두의 불행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도로시 딕스는 “대중에게 다가서는 지름길은 혀를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귀를 내미는 것이다. 내가 어떤 달콤한 말을 해도 상대 입장에서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절반만큼도 흥미롭지 않은 법이다”고 했다. 말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가 왜 소통부족을 호소하는지에 대한 정답을 이 말 한마디에서 찾을 수 있다. 말을 잘하게 하는 교육뿐 아니라 남의 말을 경청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는 게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안양옥 < 한국교총 회장·서울교대 교수 yangok@kft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