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피부색' 이라는 갈등의 불씨 활활 탔던 그 해 여름

1964년 미국 미시시피주와 2014년 미주리주

프리덤 서머, 1964
브루스 왓슨 지음 /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576쪽 / 2만5000원
1964년 여름, 미국 전역에서 모인 대학생들이 미시시피로 떠나는 버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삼천리 제공
1964년 여름, 700여명의 백인 청년들이 미국 오하이오의 대학 캠퍼스에 모였다. 인종분리와 백인 우월주의자들(쿠 클럭스 클랜·KKK)의 본거지인 미시시피로 가기 전 미국 전역에서 모인 이들이었다. 이들을 태운 버스가 미시시피주 경계선을 넘어서자 여러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굉음을 내는 자동차가 옆에 붙어서 이들의 차를 도랑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차에서 내린 이들에게는 “검둥이와 한통속인 놈들”이라는 욕설과 함께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당시 미시시피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곳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났지만 대다수 흑인은 여전히 목화밭의 소작농으로 일했다. 백인의 권위에 도전한 흑인들은 불법 처형을 당하기 일쑤였다. 흑인을 살해한 백인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흑인들에게는 투표권이 있었지만 미시시피에서는 6.7%의 흑인만이 유권자로 등록돼 있었다. 흑인이 유권자 등록을 하면 어김없이 테러를 당했다. ‘건방진 검둥이’는 두들겨 맞고 화형당하거나, 한밤중 판잣집에 날아드는 총알에 벌벌 떨어야 했다.

《프리덤 서머, 1964》의 저자는 1964년의 미시시피 상황을 “비인도적인 행위와 살인, 폭력, 인종차별적 증오에 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을 보유한 주”로 묘사했다. 저자는 이런 미시시피의 부조리를 타파하고자 미국 전역에서 모여든 활동가들의 인권운동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미시시피로 들어온 활동가들은 백인 단체의 위협 속에서도 흑인 유권자 등록 운동을 하고 자유학교를 열어 흑인 아이들을 교육했다. 그들은 가난한 흑인의 판잣집에 머물고, 질퍽한 흙길을 걸으며, 인권과 평등의 메시지를 전했다. 활동가들이 주 전역에 퍼져 활동하면서 긴장은 고조됐다. 폭력이 격화되고 흑인 교회가 불타 잿더미가 됐다.6월의 어느 날, 세 명의 활동가가 시체로 발견된 사건은 미국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후에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사건은 정치인과 유명인들이 미시시피 민권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찾아오고 해리 벨라폰테 같은 유명인들이 민권운동의 대열에 참여했다. 흑인들과 활동가들은 7월16일을 ‘자유의 날’로 선포하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백인이 대다수인 경찰은 힘으로 진압하려 했다. 미시시피는 폭력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가 됐다.

흑인들은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유권자 등록을 해 나갔다. 활동가들은 또한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여해 흑인들의 실상을 알리고 백인들만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면서 상황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도시에서 흑인 유권자 등록 물결이 이어졌다. 존슨 대통령의 민권법 서명으로 ‘백인 전용’ 표지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65년, 흑인투표권법이 통과됐다. 6개월 뒤 미시시피 흑인의 60%가 투표할 수 있게 됐다.

책은 ‘프리덤 서머’ 후 45년이 지난 뒤 활동가들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흑인들이 제대로 된 투표권을 갖게 된 지 한 세대가 넘게 지나서야 그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대통령을 갖게 됐다. 경찰에 의한 흑인청년 총격 사망으로 미주리주 퍼거슨의 소요 사태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지금, 50년 전 인종차별 철폐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걸고 앞장섰던 이들의 용기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